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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이어쓰기 Apr 29. 2024

유난히도 운이 좋은 날

1

유난히도 운이 좋은 날이었다. 


내내 먹구름처럼 우중충했던 마음에도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지난 진료 때 바꿨던 약이 잘맞아가는 덕분일까. 1년에 몇 없는 날이니 오늘을 잘 즐겨야지. 오늘은 평소 기상시간보다 훨씬 빨리 눈이 떠졌는데, 침대에서 밍기적거리고 싶지 않아 기지개를 쭉 펴고 회사에 갈 준비를 했다. 이대로라면 1시간이나 빠르게 출근하는 건데, 평소에는 죽어도 가기 싫던 회사가 오늘은,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유있게 하루 업무를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않지. 딱 이정도의 마음. 난 확실히 내 상황을 내가 통제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마침 엊그제 새로 산 옷이 배송되어 오늘은 새 옷을 입어보았다. 여유도 있으니 전신거울 앞에서 이래저래 태를 관찰하기도 하다가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지하철로 향했다. 매일 걷는 길인데 오늘따라 더 가벼운 발걸음, 신선한 바람 내음이 온몸의 미세혈관까지 찾아와 몸의 찌거기들을 정화시키는듯 했다. “절로 콧노래가 나오네”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를 작은 목소리로 흥얼 거리며 지하철에 도착했다. 


평소라면 지옥철이라 불리던 지하철이 한 시간 일찍 나왔다고 이렇게 사람이 없다고? 싶을 정도로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요새는 유연근무인지 뭔지 해서 8시 출근하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생각보다 별로 없구나.. 생각이 끝날 때쯤 지하철이 눈앞에 섰다. 와.. 지하철까지 날 도와준다고? 내가 도착함과 동시에 함께 도착한 지하철에게 마음속으로 Good boy를 외치며, 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평소라면 절대 없을 빈자리도 있어 여유를 부리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점심을 뭘 먹을까?’, ‘새로 생긴 브런치 집을 가볼까? 아니야 역시 실패 없는 순이네 백반집이 나을까?’ 생각하며 직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상 시간보다도 30분이나 일찍 도착 해버린 나는 약간의 곤란함을 느꼈지만 뭐, 여유 있게 앉아서 회사 컴으로 웹툰이라도 봐야겠다. 


7:30분. 들어가기 전 시계를 확인했다. 와 이정도면 내 직장인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빠른 출근이 아닐까? 하며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기대하며 문을 열었다. 


아.. 아뿔사, 왜 모든 직원들은 제 자리에서 마치 npc처럼 타자를 탁탁 쳐대고 있는걸까.

당황스러움과 불안이 조금씩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내 마음을 감추고 힘차게 인사하면서 자리로 갔다. 옆자리의 팀장님은 내가 오는 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모니터에만 시선이 가있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미연씨. 말도 없이 이렇게 늦으면 어떡해? 지금 시간이 몇신줄 알아?” 


팀장님의 첫 마디. 냉담을 넘어 꾹 누르고 있는 분노가 느껴졌다. 



2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핸드폰 시계를 흘끗 바라보았다. 일곱시삼십분이 맞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내 어리둥절한 표정에 팀장님은 황당한듯 물었다.

"뭐야, 미연씨 혹시 카톡안읽었어?"


카톡? 회사 카톡은 회사 카톡이란 말이 무색하게 본인들 먹은이야기 시시덕거리는 농담들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들로 알람을 꺼놓은지 오래였다. 손을 덜덜 떨며 핸드폰 잠금을 여니 카톡알람 93개. 무시무시한 숫자였다.


"회사 비상 걸려셔, 전 직원들, 오늘 동트기도전에, 나와서, 다, 다, 이러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신나서, 어?"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꾹꾹 실어담아 팀장님이 소리질렀다.

갑자기 김첨지가 떠올랐다. 어쩐지,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허리를 구십도로 숙이며, 죄송합니다를 3번쯤 반복했을쯤 팀장님은 자리로 돌아가시고 비적거리며 겨우 자리에 앉았다. 


업무 메신져가 싸여있고 업무 메일도 산더미였다. 법률적인 문제에 대한 요약들과 큰 거래처의 재정문제가 뉴스에 나올만큼 문제가 되었고, 그에 따른 대처 방안에 대한 논의, 잘못쓴 계약서 문제가 튀어나와 되려 손해가 발생하게 생긴 거래건...... 

어떻게 이게 다 하루만에 터질 수 있는지, '모르겠고요, 퇴사할래요.' 라는 말이 혀끝에 맴돌았다.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니 다 똑같은 표정. 여기저기서 한숨이 푹푹 터져나왔고, 한탄과 작은 욕설까지 조용하고 싸한 사무실. 이정도 분위기는 처음이였다.


점심식사도 거른채 밤 11시가 다되었을 무렵 한고비 넘긴 사람들이 하나 둘 퇴근하기 시작했다.

퇴근해보겠습니다. 라고 인사하며 돌아가는 뒷모습엔 내가 회사 때려친다!! 라고 쓰여있는 듯 했다. 그러나 늦게 나온 내가 저 퇴근 무리에 합류할 순 없었기에 부럽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모니터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느새 나만 남은 사무실은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였다. 전력낭비라며 반쯤 꺼둔 조명때문인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때 모두가 퇴근했음이 분명했는데, 어두운 사무실 구석에서 누군가의 혼잣말이 들렸다.



3

"미연아, 잘 살고 있어?"


이게 무슨 소릴까. 로비에서도, 탕비실에 가도, 사무실 한 바퀴를 돌아도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그러다 누군가가 켜둔 모니터를 발견한다. 파란 화면에 "미연아, 잘 살고 있어?"라는 텍스트가 출력되어있다. 이거, 방금 내가 들은 말이잖아?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고, 이 구시대적인 화면은 뭐지. 천리안이나 나우누리 시절 때나 봤을 법한 채팅 화면이다. 흠, 채팅이라.. 대답을 해볼까?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의 마음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넌 누구?


커서가 몇 번 깜빡이더니 미끄러지듯 다음 텍스트가 출력됐다.



4

"미연아, 잘 살고 있어?"


누군지 묻는 내 질문에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갑자기 나타나 잘 살고 있냐니. 키보드에 손을 올려둔 채로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일단 대답을 해볼까. '잘 살고 있지' 아니야.. '그럭저럭?' 아니야.. 그저 그런 답변들을 썼다 지웠다.


난 살아지고 있었다.

꿈도 없었고, 욕심도 없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다. 늘 그렇게 살아왔고 별 다른 문제도 없이 내 삶은 무난 그 자체였다. 전 직장을 그만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직장이야 또 구하면 되는거고, 그 동안 일도 꽤 잘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막연히 잘 될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걱정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별 소득도 없이 시간은 자꾸 흐르고 나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친하게 지내던 몇몇 사람도 모종의 사건들로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얕은 파도 위에 몸을 맡긴 채 살던 내가 조금 더 높은 파도에 올라탄 것 같았다. 그것도 내려가는 중인 파도에.  

어둠이 찾아왔다. 모든 게 내 탓 같았고, 문제의 원인을 찾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지나간 시간 속에서 보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눈을 감으면 살아있는 것만으로 찬란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후회들이 밀려왔다. 감정적인 선택, 허비한 시간들, 놓쳐버린 사람들, 잃어버린 기회들. 어두운 조각들이 빛을 밀어내고 잘못 놓아버린 테트리스 블록처럼 내 영혼을 여기저기 구멍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찬란했던 그 때를 그리워하며, 내일은 해가 뜨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운 좋게 새 직장을 구했지만 나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직장 동료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었고, 덕분에 업무에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지만 나는 항상 어딘가 불편하고 불안했다. 어떤 실수나 잘못으로 일을 그르치고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거나 미움을 살까 두려웠다. 그들 사이에 속하고 싶으면서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난 자꾸만 작아졌다. 난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잘 살고 있진 않은 거 같아"

...


"오늘도 계속 뭔가 잘못될까 두려웠어?"

내 머릿속이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채팅으로 입력하지도 않은 내 생각은 어떻게 알았는지, 조금 소름이 돋았지만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되기 때문에 질문에 집중하기로 했다.

오늘.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탓에 최악의 상황이 이런걸까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하루였다. 일찍 일어났지만 지각을 했고, 당장 눈 앞에 벌어진 상황들을 신경쓰고 처리하는 데 온전히 하루를 쏟았다. 뭔가 잘못될까 두려웠냐고. 그런 생각은 정말 조금도, 조금도 할 틈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그렇네. 내가 이렇게 눈 앞에 있는 일들에만 집중한 게 얼마만이더라.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늦게까지 일 처리를 해서 몸이 많이 피곤하긴 하지만, 매일 날 갉아먹던 그 느낌이 조금은 덜 한 것 같아. 그렇다고 매일이 오늘 같기를 바라는 건 아니야. 정말 너무 힘들었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또 한번 미끄러지듯 텍스트가 출력됐다.


"

미연아, 오늘 정말 고생많았어.

어제와 내일의 짐까지 오늘 지려고 하지 말자.

넌 있는 그대로 소중한 사람이야.

"


그 말을 끝으로 더이상 답은 오지 않았다.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화면이 꺼지고, 모니터 전원 불빛만이 깜빡였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피곤에 지친 몸은 너무나도 무거웠지만 마음은 평소보다 조금 가벼웠다. 택시에 몸을 실은 나는 창문에 기대어 휙 지나가는 가로등과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제의 짐을 지지 않고, 내일의 일을 걱정하지 않고, 그저 현재의 순간을 살아가자. 과거의 실수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자. 그저 현재의 순간을 살아가자.


오늘 밤은 약을 먹지 않아도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유난히도 운이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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