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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이어쓰기 Apr 24. 2024

지키고 싶은 것

1


넌 '이 정도면 적당한 날씨지.'라고 말했다.


어느 눈이 많이 와서 눈 속에 발목까지 푹푹 박히는 날에도, 비에 바람에 섞여 우산이 무용지물인 것 같은 날에도, 주룩주룩 흐르는 땀을 닦아내기 바쁜 날에도. 


넌 적당한 날씨라고 말했다. 그런 모습이 싫지 않아서 너한테 적절하지 않은 날씨는 언제인지, 못 견디는 날씨라는 게 존재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렇게 분명 또 너에게 적당했을 어느 흐린 날에 어떤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너는 떠났다.


누가 떠돌이 개를 살리겠다고 차도에 뛰어드니,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고 착한 것도 적당히 해야지.


장례식장은 유독 북적였다. 인복 많고 선하고 밝은 사람. 그렇게 세상 좋은것만 가득 모아놓은 것 같은 너였는데 이런 허무한 끝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너의 죽음은 온라인 세상에 박제되었다. 누군가의 감동이자 누군가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누가 찍은 영상인지 알 수 없는 영상이 올라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섬네일도 차마 볼 수 없어서 한동안 유튜브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난 어느날 좋아하지도 않던 술을 주량보다 훨씬 넘게 마신 술에 푹 절은 밤, 너를 향한 감정은 슬픔에서 분노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 어떤 대단한 개이길래, 네가 그렇게 개죽음을 당해야 했냐!' 라는 오기로 분노로 너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영상을 클릭했다.



2


영상이 나오기도 전에 맨위를 차지한 댓글에 시선이 갔다. ’정신이 좀 이상한 것 같음. 저렇게 까지 무모할 필요가...‘ 길어서 채 다 보이지 않는 댓글. 댓글을 클릭했다가는 내 맨탈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 머리에 힘을 주고 참아냈다. 


눈물이 곧 펑하고 터질 것 같았지만, 더 이상 외면하고싶지도 않아 쉼 호흡을 하고 영상을 클릭했다. 영상은 T방송사의 뉴스보도. 어느 시민의 제보영상이라고 하며 너의 얼굴만을 가린 채 영상이 재생되었다. 앞의 상황은 잘 알 수 없으나 너는 한참 그 망할 개 옆에 쪼그려 앉은 채 대화를 하는 듯했다. 얼굴이 가려져 대화를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는 그리보였다. 


개가 천천히 일어났다. 원래 누런 색의 털을 가지고 있는건지, 장기간 바깥생활을 하며 털이 누래진건지 알아보기 어려운, 몸짓으로 봤을 때 지나간 세월의 무게가 족히 느껴지는 노견으로 보였다. 일어난 개는 천천히 차도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너에게 마지막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너는 그것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었다. 


개의 움직임은 늘어난 테이프처럼 느릿했다. 마치 이승에서의 모든 미련을 다 버리는 과정처럼 보였다. 차가 휙 지나가는 속도로만 오직 시간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 누렁이가 2차선까지 용캐 갔을까. 너가 한 발자국을 떼기 시작했다.



3

다른 발을 떼기도 전에 화면은 다시 스튜디오를 비췄다. 도로에서 유기동물을 발견하면 관할 시군구청 또는 동물보호센터에 신고할 것을 당부하는 멘트를 끝으로 영상은 종료되었다.


정적이 흘렀다. 세상에는 나와 네가 움직이던 화면만 남았다. 울음이 터져나왔다. 화가 나서, 그리워서, 그 개가 미워서, 날씨가 적당해서 한참을 울었다. 밤이 가는 지 아침이 오는 지 시간도 가늠이 되지 않는 새벽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 개. 그 개를 만나야 해.


어떤 강력한 내면의 소리에 이끌려 TV 방송사, 시청, 관내의 모든 동물보호센터까지 모조리 수소문했다. 미친 소리 같지만 만나보면 알 것 같았다. 뭘 알 것 같은지 모르겠지만 알 것 같았다.


소문 끝에 찾은 그 개는 한 보호센터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개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음에도 한참이 걸렸다. 그렇게 찾아 헤맸으면서 문 앞에 도착해서도 난 망설였다. 한참을 서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다리를 움직였다.


그 개. 드디어 만나게 된 영상 속 그 개와 눈이 마주쳤다. 그 개는 나를 경계하지도, 반가워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도 그 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동칠거라 생각했던 마음이 너무나도 잔잔했다. 나와 그 개는 잠시동안 그렇게 서로를 보았고, 난 알아버렸다. 끝내 내가 알게 되버릴까봐 겁내던 그 사실. 너 정말 떠났구나. 몇 주나 흘러버린 지금 난 이제야 알아버렸다.


그 후로 몇 번을 더 그 개를 만나러 갔다. 나이가 많아 입양도 쉽지 않았던 그 개는 내가 갈 때마다 어김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찾는 사람은 나 뿐이던 그 개를 스무 번째 만나던 날, 난 그 개를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4

나는 그녀가 낯설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바깥 세상과는, 보호소와는 다른 적막한 공기가 낯설다. 아니, 사실 완전히 낯설진 않다. 나도 언젠가는 나를 아껴주는 이와 살았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나를 내려다보며 웃음 짓던 얼굴, 높은 옥타브로 나를 부르던 목소리, 내 털을 가만가만 쓰다듬던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마지막 기억은 흐릿하다. 오랜만에 산책에 나서 설렜던 그날, 줄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슬그머니 사라졌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한 동안은 그녀를 놓친 그 자리를 빙빙 돌며 그녀를 찾곤 했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연분홍색 벚꽃이 내리고, 하얀 눈이 까만 코 위에 내려앉을 때까지. 순전히 내 잘못이었다. 왜 오랜만의 산책에 들떠서 그녀를 놓쳐버린 걸까.


그렇게 나는 떠돌이 개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더럽고, 못생기고,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뒤지는 존재였으니까. 캄캄한 밤이 되면 깊고 우울한 바다에서 그녀를 찾아헤메는 꿈을 꿨다. 이 사람, 저 사람 확인해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미워하는 성난 사람들의 얼굴만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날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던 사람이 있었다. 해가 떠오르면, 그리고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늘 먹을 것을 갖다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던 사람. 그리고 어느 흐린 날, 언제나처럼 그 사람은 나와 눈을 맞추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나를 쓰다듬었다. 


울컥, 나를 만지던 그녀의 손길이 떠올라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차도 쪽으로 걸어가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의 섬광이 스치고- 어느새 나는 그 사람 품에 안겨있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사람의 몸을 핥아도, 또 핥아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경찰의 손에서 보호소로, 보호소에서 지금의 이 낯선 공간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여기저기서 자꾸 그 다정하던 사람의 냄새가 났다. 여기 안락의자에도, 옷장 속 체크셔츠에서도, 침대 옆 한쪽 공간에서도. 그 사람의 냄새가 배어있는 곳에서 자면 우울한 바다에서 헤엄치는 꿈을 꾸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어느 밤, 이 공간의 주인인 그녀가 누운 침대에 슬며시 올라갔다. 사실, 그녀에게도 그 사람의 냄새가 났다. 그래서 처음부터 싫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몸을 기댔다. 한동안 들썩대는 움직임이 계속됐다. 얼굴을 보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슬프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눈물을 핥아주자 이제는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내가 또 뭔가 잘못한 걸까, 한 발 물러서니 도리어 나를 꼭 껴안는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손길이 내 머리를 스쳤다. 이 손길, 익숙해지면 안되는데. 그리고 몇 시간이고 나를 쓰다듬는 그녀. 아아, 항복이다. 이번엔 절대 이 사람을 놓치지 말아야지, 하며 혼자 다짐해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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