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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이어쓰기 Apr 19. 2024

가짜는 없다

1

새벽 3시까지 이어진 술자리로 비몽사몽한 아침. 오늘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마셔댄 걸까. 이를 닦으니 웩웩-하고 헛구역질이 몰려온다. 하, 정말 쉽지 않은 하루가 되겠군.


쌩얼에 겨우 모자를 눌러쓰고 나온 출근길. 어제 술자리에서 그 사람에게 들었던 말을 되새겨본다. “정연님, 우리 둘만 얘기하라고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준 것 같아요.” 어제 듣고는 술기운에 무슨 소리지, 하며 넘겼는데 다시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간다. 이게 무슨 뜻일까.


2

조각난 기억들을 다 꺼내기도 전에 회사에 도착했다. '괜히 서둘렀나..?' 사무실 불을 켜고 숨은 듯이 자리한 책상에 앉아 어제 하던 일을 마무리하려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타닥타닥....

그 말, 무슨 뜻이었을까. 무슨 이야기를 더 했을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말 밖에.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조차도.


"정연님, 우리 둘만 얘기하라고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준 것 같아요."

"그런가요?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진짜..."

"...?"

"진짜 정연님... 지금 어디있어요"


쾅!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 끝이 얼얼했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는지 저 먼 복도끝까지 정적만 흐르고 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정신을 차려본다. 정신이 맑아짐과 동시에 혼탁해진다.

'꿈? 기억? 누구지? 뭘 알고 있는거지?'


3

그런데 이게 꿈이든 기억이든 나는 왜 분노하고 있는거지? 진짜 정연은 나일 수 밖에 없잖아. 왜 기억이 떠오른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을까..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팀원들이 헐레벌떡 출근하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일단 침착하자. 다들 어제 각자 무슨 밤을 보냈는지 퀭한 얼굴에 아이스아메리카노로 긴급 수혈하며 들어오는 사람들. 음가 하나 없이 기계처럼 인사를 하고는 각자 자기 자리로 가는걸 멍하니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다. 어제 만난 사람과 얘기를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다. 조각난 기억도 맞춰봐야 할 것 같고. 근데... 나 어제 누구랑 만났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만나자는 말에 약간 망설이다가 약속을 잡은 건 기억이 나는데 왜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걸까? 급하게 어제의 통화목록을 뒤져보았다. 통화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저런 단체카톡방에 민망함을 무릅쓰고 물었다 “하하 혹시 어제 저랑 만나신 분~” 시간이 지나는데 아무에게도 답이 없다. 


“....”

“정연씨?”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팀장님이었다. 카톡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누가 왔는지조차 몰랐다. 망했네. 


“네, 팀장님”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바빠? 내가 주는 일 말고 다른 일이라도 하는거야?” 

“아뇨 그럴리가요. 필요한 것 있으세요?” 

“아니, 그건 아니고 어제 잘 들어갔나해서” 

“아...!?”

“정연씨가 너무 취해보이길래 택시까지는 잡아줬는데, 그이후로는 연락도 없고 해서 걱정했거든. 무슨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아 제가 어제 팀장님과 함께... 아니, 네 별 일 없었어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러면 됐고.” 

“근데 팀장님.. 혹시 잠시 시간되세요?” 


4

팀장님은 웃으며, 퇴사한다는 말만 아니면 오케이지 하며 흔쾌하게 카페로 가자며 앞장스셨다. 


자리에 앉아서도 한참 운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자, 팀장님이 먼저 이야기르 ㄹ꺼냈다. 

"어제 내 질문때문에 혼란스러워?"


역시 어제 그 질문은 팀장님이 한 질문이였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팀장님을 빤히 보았다. 

팀장님도 눈을 피하지 않았고 조용한 침묵이 몇 분 더 이어졌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확언하기 어려워 망설이던 말을 내뱉았다. 

"제가 정연이에요."

팀장님은 얼굴에 옅게 남아있던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내가 진짜 정연이를 몰라서, 정연씨, 아니 당신에게 그 질문을 했을것 같아요?"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묘한 말투로 차가운 말투로 팀장님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 정연이를 유치원때부터 봐왔어. 중학교 들어갈 무렵 이사를 가면서 연락이 끊겼지만 그 전까진 아침저녁으로 보던 내 친동생 같은 앤데 내가 그걸 몰라볼까봐?"


손에 난 땀을 바지에 닦으며, 늘 듣고 자라던 말이 떠올랐다. 

'니가 그 자리에 있으려면, 그 정도론 어림도 없어.'

'티가나는건 어쩔수없네, 진짜 우리 정연이였다면...'


이런 말을 듣고 난 날에는 나는 얼굴도 모르는 정연이를, 진짜 정연이를 꿈속에서 몇시간이고 바라봐야했다. 그리고 무던히 그 움직임을 따라하고 연습하고 모방하는 꿈은 끝나지 않을 듯 계속 반복되었다.


"처음엔 이름만 같은 줄 알았지. 성이 너무 특이해서 설마 했지만, 날 못알아보는 것도 그렇고 아예 '다른 사람'이니까 아니라고 생각했지."

팀장님은 다시 한번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내 얼굴 어딘가에서 혹시 '진짜 정연'의 흔적이 있는지 찾고 있는 것 처럼.

"근데. 부모님 직업에 성함까지도 같은 그 정연이 또 있다고? 내가 당신 인사기록을 좀 봤거든. 말이 안되잖아."


정연은 고작 15년을 채 살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정연이 되어 살아온 날들이 진짜 정연이 살던 날보다 더 길어진 어느 서른쯤이 되던 날, 난 더이상 정연의 꿈을 꾸지 않을 수 있었다. 


"제가 '그 정연'보다 정연으로 오래살았는데, 그러면 제가 정연이죠."

"무슨소리야?"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음료에서 빨대를 뺴내고 벌컥벌컥 들여마시고 얼음을 아드득 씹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아주 오래도록 집에서 금기된 문장을 내뱉았다.

"당신의 정연이는 죽었어요."


정연이가 죽고 나를 다시 정연이라는 이름으로 입양한 미친 나의 부모님. 


그 밑에서 나는 완벽한 정연이의 대타가 되어야했다. 내 모든 일거수 일투족은 본적도 없는, 실체가 없는 존재와 비교당했고 나의 본래 이름은 영영 잊고 말았다. 

난 정연인데 왜 정연이가 아니라고 할까. 라는 고민은 사치였다.

사춘기도 겪지 못하고 어른부터 되어야했다. 아니 정연이가 되어야했다. 16살, 17살, 20살의 정연이는 실존한적이 없었지만 난 그 실존하는 정연이를 만들어내야했다. 

우연하게 어떠한 작은 부분들이 '진짜 정연'과 맞아떨어지던 순간 날 바라보는 양부모의 눈빛에서 나는 일말의 애정을 보았다. 날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아도,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모든 나날들을 완벽한 정연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손짓, 말투, 걸음걸이. 겨우 몇편의 동영상으로 남은 정연이를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지만 고직 10살, 12살의 정연의 동영상만으론 18살, 20살의 정연이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분노하다 절망하다 미쳐가는 부모님을 바라보고 다시 또 난 연습하고 상상하고 연기했다.

그것이 내 서른 이전의 삶의 전부이자 목적이였다.


내가 정연이 살았던 날들보다 더 오래 정연으로 살게 된 그날, 나는 집을 나왔다. 어떤 계시같았다. 깨달음이였다. 내가 그 아이보다 이 이름으로 오래살았다면, 내가 정연이 아닐 수 있나? 


어머니가 캐리어도 아닌 배낭하나만 들고 현관에 선 나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니가 진짜 정연이면 이럴 수 없어!' 

양어머니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녀를 상처줄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있었지만, 말을 아꼈다. 그조 다짐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제가 정연이에요. 진짜도, 가짜도 없고 그냥 제가 정연이에요'


긴회상을 마치고 눈앞에 벙쪄있는 팀장님에게 내 삶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거나 이해시키거나 할 의지가 없었다. 누가 진짜, 누가 가짜 그 이야기들에서 이제 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저 써야할 메일이 있어서, 먼저 복귀하겠습니다."

아직도 멍한 표정의 팀장님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에 건 사원증엔 내 이름 세글자가 선명했고, 나는 정연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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