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글이 편한 이유
살면서 '말'이 더 편하고 좋다고 느끼는 때는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소통할 때뿐이다.
그들과의 대화에는 어떠한 저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다. 수면 위의 불규칙적으로 떠오르는 기포처럼 생각나는 대로 말해도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는 반드시 그 시답잖은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주고 기분 좋은 추임새를 넣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똑같은 '말'이라도 크고 작은 '목적'을 지니기 마련이다.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물건을 사기 위한 중고거래에서, 1인분 같은 2인분을 바라는 마음으로 메뉴를 주문하는 식당에서, 좋은 매물을 나한테 가장 먼저 보여줬으면 하는 부동산에서 우리는 내재된 의도를 가지고 '말'에 신경을 쓴다.
그뿐이랴,
강약, 빠르기, 어휘 선택은 물론 말하는 눈빛이나 표정까지 계산하지 않으면 목적 달성은커녕 불필요한 오해만을 양산한다. 그래서 옛말에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했지 않던가.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의도가 난무하는 '말'은 직장 안이 최고다. 이를테면, 상사에게 내가 의도한 대로의 의사 결정을 하게끔 업무 보고를 할 때가 그렇다. 어떤 계산도 없이 말한다면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 쫌, 고민하는 척하지 말고 그냥 내 말대로 결정이나 해. 어차피 잘 모르잖아"
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조기 퇴사로 내 생계에 크게 위협이 가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곧 무대 위로 올라가야 하는 연극배우로 빙의한다. '순종적인 부하직원' 역할을 위해 눈썹을 갈지자로 만들고, 불쌍한 고양이 눈을 뜬다. 목소리는 낮고, 빠르기는 천천히, 상대에 대한 조심스러움을 담아 약간의 떨림까지 더한 뒤,
"저... 이러한 문제가 있는데요, 해결 방안으로 두 가지를 고민하다가... 이러이러한 측면에서 첫 번째가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그렇게 진행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반면에 '글'은 그러한 비언어적인 요소에 덜 구애받는다.
정중한 메일을 포악한 표정을 짓거나, 육두문자를 뱉으면서 작성한다 한들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쓴다면 상대에게 그 어떤 오해를 줄 일도 없다. 그래서 감정 소모가 훨씬 덜하다. 심지어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게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글은 실수를 정정할 수도, 지울 수도 있다. 게다가 발송과 수신에 대한 디지털 기록이 정확히 남기 때문에 책임 소지를 규명할 때 더없이 효과적이다. "나는 들은 적 없는데?" , "그런 말 한 적 없는데?"라고 발 뺌 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또한 '글'보다 '말'이 빠르다는 말도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옛말이다.
오히려 '말'을 위해서는 상호 간의 일시를 정해야 하는 추가적인 시간이 소요되지만 '글'은 '발송' 버튼 하나면 1초도 안 걸려 수신인까지 전달이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말'은 쌍방향이고 '글'은 일방적인 소통 수단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사고이지만, 내 생각은 정확히 반대다
애초에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과는 '말'보다는 '글'이 훨씬 더 효과적인 소통수단일 때가 많다. '근거가 남는다'는 보이지 않는 '족쇄'는 '자리보전'에 사활을 거는 '그들'에게 불가피한 신중함을 주기 때문이다.
난 그래서.. '글'이 훨씬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