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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레이 Mar 09. 2024

인간은 원래 별로인 존재

선하기보다는 악하기 쉬운 존재

남편은 내가 사람들 눈치를 너무 많이 본다고 한다. 시쳇말로 '사람들 앞에서 너무 쫀다'라고 표현한다.


눈칫밥을 먹고 자란 유년시절의 영향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더 유난스러운 경향이 없지는 않다. 인정한다.


옷가게에서 이 옷 저 옷 입어보는 남편을 보면, 나는 점원의 눈치를 보느라 안절부절하곤 한다.

그럴 때는 점원의 설명에 일일이 맞장구 쳐주며 기분을 맞추느라 진을 뺀다.

옷을 사지 않았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질 점원의 실망감과 힘 빠진 목소리에 대한 미안함을

심적으로나마 조금이라도 보상(?)을 하기 위해서다.

물론 그러한 나의 행동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얼마전에는 몇 시간째 지속되는 큰 소음의 출처 확인을 위해 다른 층에 갔다가

눈 앞에서 느닷없이 열리는 현관문 소리에 황급히 몸을 숨겼는데, 결국 발각되어 문초(?)를 겪기도 했다.

놀랄 일도, 숨을 일도, 심지어 추궁을 당할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낯선 타인의 모습에  

40여년 인생사의 연륜이 무색한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남편은 내가 당당해져야 한다고 한다.

남편이 보기에는 사람들 앞에서 쫄면이 되는 내 모습이

'자신감 부족'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다.



나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별로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장 큰 샘플은 나 스스로가 너무도 별로인 적이 많기 때문이다.


'나를 좋게 보는'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모습들은 진짜 별로인 내 모습을 여러 단계에 걸쳐 촘촘하게 걸러낸

극히 일부의 결과물일 뿐이다.


실제 나의 내면에는 온갖 불순물로 가득 차있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에게 느끼는 동정과 연민의 속내는 현재 삶에 대한 은근한 상대적 우월감을,

나보다 잘 사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의 속내는 상대가 곧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노골적인 시기와 질투가 

뒤섞여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이 최우선인 인생을 살아간다.  

서로 다른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생활도 결국 각자의 이기심을 끊임없이 절충하고 타협하며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평화'를 이루고 있을 뿐인 것이다.


점원에게 상냥한 미소와 친절을 베푼 나의 속내는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서였다.  

실망한 점원이 혹여 나의 하루를 망치는 불쾌한 언행을 하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이 더 최악이지 않을까.. 하는 '타인과 나 자신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시작됐을 뿐이다.




인간 행동에 대한 '불예측성'이야말로 내가 사람을 어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인데,

낯선 사람일수록 쭈뼛거림의 정도가 더 격해지는 것은

'그 조합'에서는 나의 행동조차 예측이 안되기 때문이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더 무서운 건 그런 상대에게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모르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과거 경험에 비춰봤을 때,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표출됐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험한 것'을 의미한다.


이렇다 보니 사람을 대하는 일이 살얼음 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내가 먼저 조심하지 않으면 상대로 하여금 '지독히 별로인 내 모습'을 기어코 마주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내 기준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는 건  

타인의 민낯을 끌어내지 않음으로써

내 안의 못생긴 아이들이 함부로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과정이다.


누구라도 오전에는 선인이었다가, 오후에는 악인일 수도 있다.  스스로 통제하지 않으면 '선하기 보다는 악하기 쉬운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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