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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레이 Jun 13. 2024

사람은 염치가 있어야 해요.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는 사람들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나는 이 문구의 주제를 한 단어로 이해하고 있다.

 

'염치'


'염치 =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인간은 본래 선하기보다 악하기 쉬운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염치'만 있다면 최소한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배척당하는 일은 면할 수 있다.


저번에 친구가 샀으니, 이번에는 내가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마음,

내 결혼식에 어려운 걸음을 해준 하객에게 감사를 담아 답례선물을 준비하는 마음,

집들이에 초대해 준 지인의 집에 빈 손으로 가지 않기 위해 선물을 고르고 고르는 마음..


그런데 간혹 이 염치를 완벽하게 지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에게도 그런 행동을 받아본 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애써 무시하고 사는 건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그런 사람들을 겪고 난 후에 나의 기분은 '이용당했다'라는 생각에 찜찜함을 금할 수 없다는 점이다.




취업 상담 현장을 예로 들면,

약속한 상담 시간에 단 몇 분만 늦어도 연신 죄송함을 표현하며 기어코 커피까지 사들고 오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정해진 1시간 상담을 훌쩍 넘겨 컨설팅을 해주는데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는 학생도 있다.


얼마 전에도 꼭 같은 일이 있었다.

과거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됐을 뿐인 한 학생이었다.

11시가 다 된 시간에 한통의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첨부된 자소서 파일'이 첫 줄이었다.


그야말로 다짜고짜였다.


프로그램이 끝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친구는 '프로그램 끝나도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해'라고 진심을 표현한, 한 취업 컨설턴트와의 인연을 그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자소서 첨삭 치트키' 쯤으로 여겼던 듯싶다.


취업을 했음에도 시도 때도 없이 이직용 자소서 파일을 먼저 보내놓고는 피드백을 요구하는 것이다.

번이고 심지어 어떤 때는 새벽까지 실시간으로 코멘트를 하며 순수한 호의를 베풀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친구가 조금이라도 미안하거나 고마운 마음을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왜 진심은 통한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나의 호의를 강탈해 간  그 친구의 다음 연락은 항상 늦은 밤에 무턱대고 보내는 자소서 파일이었다.  또다시 그 흔한 인사말조차 없이 보낸 무례한 메시지에 나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아니, 솔직히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차단하고 연락을 끊어버릴까도 싶었지만 상대가 '청년'이라는 데에서 제동이 걸렸다.

청년들에게만 유독 마음이 약해지는 일종의 직업병 탓이다.  몸만 어른인 정신적으로는 어린 아이나 다름없는 그들에게 나름대로 '좋은 어른'이 되어주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기 때문이다.


괘씸한 마음을 어렵게 진정시킨 후 메시지를 보냈다.

읽씹, 안읽씹으로 그 친구가 나로부터 무시당했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았다.


"00아, 계속 늦은 시간에 이런 부탁하는 거 선생님한테 실례야. 이미 취업도 했으니 이제는 네 스스로 알아서 고민해 보는 게 좋겠다"


장문의 사과문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반성이 담긴 회신을 내심 기대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렇게 왔더라면 이번까지만 피드백해주겠다고 할 참이었다)


'넵,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 한 마디가 전부였다.

지난 1년 여 간을 내 시간과 에너지를 수시로 뺏었던 친구였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 빠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허탈함을 느끼고 있는 찰나,

또 다른 학생에게 오랜만에 톡이 왔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저 00 기업 최종면접 앞두고 있어요. 쌤 덕분에 좋은 기회 얻었어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올게요."


"쌤이 뭐 도와줄 건 없고?"


라는 말이 자동 반사로 보내졌다. 상대가 보여주는 염치에 따라서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무한 제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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