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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함께한 추억

by 문용대

며칠 전 경기도 김포 들녘 어느 집 앞을 지나며 소(牛)를 마주하게 됐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농촌에서 자란 나는, 어릴 적부터 소와 함께하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내 어린 시절의 친구였고, 농사일의 동반자였으며, 삶의 한 부분이었다. ‘소 닭 보듯 한다.’라는 말처럼, 닭을 보고도, 사람을 보고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느린 걸음과 그 눈빛에는 성실함과 인내, 그리고 삶의 평온함과 신뢰가 담겨 있다. 조용하고 우직한 모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소띠 친구들을 참 좋아한다. 대부분 우직하고 믿음직하고 한결같은 그들 모습 속에서 소의 성품을 보는 듯하다.


어린 시절 학교가 끝나면 종종 소를 몰고 산으로 향했다. 목에 고삐를 감아 풀을 뜯게 하고, 나는 바닷가로 달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놀이를 즐겼다. 햇볕 아래 하루 종일 뛰놀다 보면 온몸은 새까맣게 그을렸다. 그러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소를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종종 소를 잃고 산과 들을 밤새도록 헤매며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 긴장과 걱정 속에서, 소를 다시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과 기쁨은 어린 마음에도 깊이 새겨졌다.


우리 집에는 소달구지가 있었다. 짐을 싣고 멀리 가신 아버지를 호롱불 들고 마중 나갔던 일, 가을에는 쟁기 뒤를 따라가며 흙 속에서 드러나는 고구마를 서둘러 줍던 일이 생각난다. 느릿느릿 걸으며 풀을 뜯는 모습, 한가롭게 되새김질하는 모습, 긴 꼬리를 휘둘러 몸에 붙은 파리를 쫓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정겹다.


쇠죽 쑤는 것은 사람이 세끼 밥 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이었다. 소를 봄부터 부리려면 겨울 동안 잘 먹여 놔야 한다. 마구간에 짚도 자주 넣어 주고 쇠똥도 자주 쳐 줘야 한다. 그러지 않아 소가 그걸 깔고 앉으면 엉덩이나 배, 다리에 보기도 민망한 그림이 그려진다. 잘 먹이고 쇠똥도 자주 쳐 줘야 논밭에 뿌릴 거름도 많이 생긴다.


돌이켜보면, 소는 인간에게 단순한 가축 이상의 존재이다.


소가 주는 혜택은 헤아릴 수가 없다. 인류의 식탁에 큰 몫을 차지한다. 우유, 치즈,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은 단백질과 칼슘을 제공하며 영양을 책임져 왔고, 소고기는 철분과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이다. 게다가 뼈와 뿔, 가죽과 털은 다양한 형태로 재활용되어 인간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 소가죽으로 만든 신발과 가방, 뼈에서 얻은 단백질의 일종인 ‘젤라틴’과 접착제, 심지어 소의 쓸개 속에 뭉친 덩어리인 우황(牛黃)은 귀한 약재로 쓰인다. 그야말로 버릴 것이 없는 존재이다.


소의 분뇨 또한 소중하다. 그것은 밭으로 돌아가 비옥한 흙을 만들고, 곡식과 풀을 다시 자라게 한다. 풀을 먹고 젖을 내고, 다시 그 부산물이 농토를 살리는 순환은 자연과 인간, 소가 맺은 긴밀한 공생 관계를 보여준다.


소는 밭을 갈고, 짐을 지며, 묵묵히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동물이다. 성경에 소와 관련한 구절이 많다. 여러 내용 가운데 대표적인 의미를 꼽으라면,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자의 모습이라 하겠다. 소는 희생(犧牲)의 대명사이다. 그래서인지 희(犧) 자에도, 생(牲) 자에도 소 우(牛) 자가 들어있다.


소는 실질적인 도움을 넘어 많은 문화권에서 신성한 상징으로 격상되었다. 특히 힌두교에서는 소를 '어머니 소'라 부르며, 대지모신(大地母神)의 화신으로 여긴다. 젖을 내어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헌법과 법률이 소 도살을 금지하거나 강력히 제한하기도 한다.


불교와 자이나교에서도 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불교에서 소는 깨달음을 향한 길을 걷는 마음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선종의 ‘십우도(十牛圖)’에서 소를 길들이는 과정은 곧 마음을 닦아내는 수행을 의미한다. 자이나교에서는 모든 생명이 불살생의 대상이 되는데, 특히 소는 순수하고 해가 없는 존재로 존중받는다.


고대 문명에서도 소는 힘과 풍요의 상징이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소가 농경의 동반자이자 성실함의 상징이었다. 중국에서 소띠는 근면과 끈기를 의미했고, 한국에서는 소를 집안의 기둥으로 여겼다.


소는 어느 문화에서나 단순한 가축이 아니었다. 땀과 젖, 고기와 가죽, 뼈와 분뇨까지, 삶의 모든 부분에서 인간과 더불어 호흡하며 존재의 가치를 드러냈다. 때로는 신성한 존재로 숭배받았고, 때로는 풍요와 희생의 상징이 되었으며, 때로는 가정과 마을을 지탱하는 밭 일꾼이었다.


소는 인류 문명의 그림자 속에서 묵묵히 길을 걸어온 벗이다. 인간이 걸어온 길마다 소의 발자국이 함께 찍혀 있었고, 그 발자국 위에서 우리는 삶을 일구고 문화를 쌓아 올렸다. 그래서 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이로운 짐승’을 넘어, 인간과 더불어 살아온 신성한 동반자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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