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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한 온도 Apr 15. 2024

시댁 할머니와 정이 많이 들어버렸다.

여행 둘째 날, 맑았던 제주 하늘.


시댁 식구들과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인원은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시아버님,
남편, 나, 첫째, 둘째
이렇게 7명.


남편은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 존재감이 거의 엄마나 다름없다. 할머니도  남편을 막내아들처럼 생각하신다.


오죽하면 나와 결혼 한 직후에 빈 둥지 증후군과 우울증을 동시에 앓으셔서 약을 잠깐 드실 정도였다. 너무 힘들어하셔서 그때 우리가 키우던 강아지 중 한 마리를 할머니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에 반면 나는 할머니가 없다.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한테 할머니라는 이미지도 시댁 할머니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남편과 내가 결혼 한 지 올해 8주년이니 나도 할머니를 8년간 본 셈이다.


처음에는 손주 바라기인 할머니가 불편하기도 했다. 아마 우리 남편이 똥을 된장이라고 해도 그렇다고 하실 정도이니 신혼 때는 당황을 많이 했다.


남자는 다 애라며 힘든 일 있어도 우쭈쭈 해가며 살라 고도 하시고,
혹시 손주가 바람피워도 한 번 봐주라고도 하시고^^ (바람피운 건 얄짤없다고 응수했다^^)


무슨 대화를 해도 다 손주 최고로 끝나니까 가끔은 얄미운 마음도 들었다.



© dani_franco, 출처 Unsplash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정이 쌓여서 그런지 이제는 할머니가 손주 최고라고 대화를 끝맺으셔도 귀엽기만 하다.


직접 겪어보니 할머니는 1을 해드리면 오히려 2를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분이시다. 명절에 용돈 드리면 더 얹어서 첫째에게 다시 돌아온다. 우리가 밥을 사면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좋은 밥을 사주신다.


이렇게 드린 것보다 받는 게 더 많으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죄송한 마음이 커진다. 뭔가를 더 해드리고 싶고 좀 더 편히 사셨으면 좋겠고 마음이 쓰인다.


사실 이번 여행도 할머니가 가고 싶어 하셔서 남편이 추진한 거였다. 최근 더 깜빡깜빡하시고 이제는 눈도 잘 안 보이셔서 그런지 올해 유난히 여행을 가고 싶어 하셨다.


물론 시댁 식구 완전체는 아니었지만 이번 여행, 할머니가 좋아하셔서 나도 참 좋았다.


평소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둘이 여행을 가면 여행지에서조차 할아버지한테 식사를 차려드려야 한다. 할아버지 채근에 밀려 할머니가 좋아하는 커피숍도 못 가신다.


그런데 이번에는 식당 가서 음식도 사 먹고, 포장해 와서 먹고, 카페도 가고, 여유 있게 움직이셨으니 정말 좋아하셨다.


할머니 덕에 알게 된 고사리 축제장에서 축제 구경은 안 하시고 갑자기 산에서 고사리를 뜯으시는 우리 할머니.



한 땀 한 땀 뜯은 산 고사리


숙소에서 삶아 말려놓은 고사리를 바라보는 표정이 어찌나 귀여우신지. 잠들 때까지도 고사리 신나게 뜯었다고 으쓱해 하셨다.


이제는 비행기도 좀 힘들어하셔서 할머니와 함께하는 제주도도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거동이 더 괜찮으실 때 조만간 강화도나 강원도 쪽으로 할머니 모시고 또 다녀오려 한다.


어느새 정이 많이 들어버린 시댁 할머니.
시간이 더 있을 때
기억이 아직 선명할 때
함께 걸을 수 있을 때
여행 더 많이 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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