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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민지 Jul 07. 2022

일본 유치원 엄마의 선전포고

엄마 걱정은 알겠지만요


올봄, 유치원에서 난처한 일을 겪었다. 이른바 '안경 사건'.


시뽀 유치원에는 K 군이 있다. K 군 엄마는 핫서방과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이 유치원 출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원에 대한 애착이 아주 많은 듯했고 학부모 임원을 일부러 지원해서 맡을 정도로 활동에 적극적이다.


K 군 엄마는 동네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많다. 핫서방과 나를 처음 보았을 때 "부모님이 야채가게 옆에 살죠? 핫토리 집안 셋째 아들이 외국인이랑 결혼했다더니 그분들이신가 봐요."라고 했다. 아니, 초면인데 우리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 동네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갖고 있어 놀랐다. 


유치원 생활도 다르지 않다. K 군 엄마는 타인과의 정보 교류(?)를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각 반 아이들과 보호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K 군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어떤 내용으로 입에 오르내리는지에 대해서도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그런 K 군 엄마가 학기 초 보호자 모임에서 꼭 해야 할 말이 있다고 했다. K 군이 이번 학기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는데, 그걸 놀림감으로 삼거나 괴롭히지 않도록 각 가정에서 아이들 교육을 철저하게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보호자들은 잘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핫서방과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치원 아이들이 순둥순둥해서 지금까지 서로 놀리거나 괴롭히는 일이 없었고, 보호자들도 상식적인 대화가 통하는 보통의 어른들이었으니 말이다.


안경이 대단한 놀림거리도 아니고 큰일이 있겠나 싶었다. 나도 K 군과 비슷한 시기인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지만 크게 놀림당하거나 괴롭힘당한 기억이 없다.

가끔 어른들이 안경 쓴 나를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안경 쓴 걸 보니까 넌 공부를 참 잘 하나 보다", "민지는 책을 많이 읽어서 안경을 썼나 보다" 같은 말을 해서 불편할 때는 있었다. 안경과 공부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경을 쓴 이상 왠지 공부를 잘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 느껴졌달까! 하지만 아이들은 그냥 '안경'이라는 물건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할 뿐이었다.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이 없는 상태였다.


본격적인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K 군은 예정대로 안경을 맞춰 왔다. 그런데...! 안경을 처음 쓴 바로 그날 K 군 엄마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얼마나 화가 많이 났냐면, 아이를 등원시키러 유치원에 왔다가 발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정도였다.

그날 K 군 엄마는 단체 대화방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유치원에 결석시키고 그냥 간 이유는 "지난번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K 군을 안경 썼다고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하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K 군이 안경을 쓰고 등장했을 때 아이들은 안경에 대한 1차원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 K 군 왔네? 안녕! K 군~ 오늘 안경 썼네" 하는 반응이었다. "어? 주말에 머리 잘랐네?", "어? 새 티셔츠 샀네?"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정도였다.

그런데 K 군 엄마는 아이들에게 "안경 처음 봐? 엄마가 안경 쓴 사람 괴롭히지 말라고 얘기 안 했니?"라고 씩씩대며 되받아쳤다. K 군 엄마에겐 '안경'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 자체가 괴롭힘으로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아이 손을 낚아채 다시 집으로 돌아갔으며, 앞으로도 누군가가 안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안경 쓴 K 얼굴을 오랫동안 쳐다본다면 다음에도 유치원에 등원시키지 않을 것이니 다시 한번 가정에서 괴롭힘 방지 교육을 해 달라고 모두에게 라인을 보내온 것이다.


이 라인을 받은 같은 학년 40여 명의 보호자 중 3명 정도는 답을 했다.

"혹시 안경에 대해 이야기한 아이가 우리 아이라면 정말 죄송합니다. K 군이 이번 일로 나쁜 기억을 갖지 않게 집에서 잘 말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는 바보입니다.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르면 바로 말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실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미리 사과합니다."


"쓰기 싫은 안경을 쓰는 것도 괴로운데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친구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K 군 내일은 유치원에 꼭 와 주세요."


이런 반응이었다. K 군 엄마를 잘 따르는 사람들이 보낸 회신이었다.


우리 아이는 바보이니 양해를 부탁한다니... 세상에 이런 표현이 있을 수 있나?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사과였다.

불쾌하기도 했다. K 군 엄마와 그 측근들이 다른 아이와 보호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엄포를 놓고, 자기 아이를 이지메하지 말라는 이유로 모두를 이지메하는 것 같아서였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나는 두 가지 상반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1.

유치원 엄마들의 상당수는 안경을 쓰고 있고 핫서방도 나도 안경을 쓴다. 안경이란 흔한 것이다. K 군 엄마 입장에서는 만에 하나 일어날 놀림이나 괴롭힘이 걱정될 수도 있겠지만, 안경을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물건 중 하나로 무덤덤하게 대하면 아이들은 오히려 '안경은 시력을 보조하는 기기일 뿐이구나', '그래도 공놀이할 때는 조심해야 하는 거구나' 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시뽀는 안경과 선글라스라는 물체를 궁금해하기도 하고, 자기도 눈에 쓰는 물건이 갖고 싶다고도 하며, 안경을 멋있는 물건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친구에게 "안경 썼네?" 정도도 말할 수 없고, 안경 쓴 친구 얼굴을 오래 보아서는 안 된다고 교육해야 한다면... 오히려 없던 선입견을 만드는 일이 되지 않을까? 다른 아이들 중 몇몇도 나중에 안경을 쓰게 될 텐데. 지금의 경험이 훗날 아이들을 불필요하게 위축시키지는 않을까? 앞으로 안경 쓴 친구를 대할 때 실수하지 않으려 안절부절못하다 부자연스러운 관계를 만들게 되지는 않을까?


나도 외국인 엄마로서 "엄마가 외국인이라 아이가 불필요한 소리를 들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었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에 대한 우려로 "제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우리 아이를 놀리거나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여러분 모두 가정에서 철저하게 교육해 주십시오."라고 미리 선언하거나, 어린이들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 하는 것 자체를 원천 차단해달라고 요청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모든 유치원 아이들을 잠재적인 이지메 가해자로 대하고 싶지 않아서. 대응이 필요하다면 실제 가해자에게만 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엄마가 외국인이라고 놀리지 말라'라는 당부 자체가 '외국인은 보통 놀림을 당하는, 내국인과는 뭔가 다른 존재'라는 선입견을 만들까 봐서다.


2.

그러나 1번과는 반대의 생각도 든다. 사람에 따라서는 '악의 없는 친구들의 관심' 자체가 그냥 다 부담스러울 수 있다. 2년 전 시뽀가 머리를 짧게 잘랐던 날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여름이라 머리를 바짝 짧게 깎았는데, 시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 머리가 너무너무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였다.


시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칭찬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아이는 머리에 대한 이야기 꺼내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놀라운 건, 지금도 2년 전 그 사진을 보면 울상이 되어 울먹인다는 거다 ㅜㅜㅜ (그 머리가 그렇게 맘에 안 들었니?) 그러니 K 군 역시 안경의 ㅇ자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고, "안경 잘 어울리네" 하는 칭찬이 괴로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괴롭힘의 기준도 아이마다 다를 것이다.

- 안경을 벗겨서 내동댕이치는 것이 괴롭힘이라고 생각하는 아이.

- 안경을 손가락질하며 깔깔 웃는 것이 괴롭힘이라고 생각하는 아이.

- "어? 안경 쓰고 왔네" 하는 인사. 혹은 누군가가 안경 쓴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는 것이 괴롭힘이라고 생각하는 아이.

괴로움을 느끼는 기준은 K군에게 있고, 함께 생활하는 친구들은 K군이 싫어하는 행동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K군은 어떤 행동을 괴롭힘이라고 느낄까?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없었다. K군 엄마가 아닌, 당사자인 K군의 기분을.






다음 날 아침 등원시간. 핫서방과 나는 시뽀에게 뭐라고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안경 쓴 모습을 조롱거리나 웃음거리로 삼아서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만, 안경에 대해 말도 꺼내지 말고 오래 쳐다보지도 말라고 해야 한다니! 안경이 무슨 볼드모트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일단 K 군 엄마에게 요구받은 이야기를 그대로 해 둘 수밖에 없었다. 안경의 ㅇ자도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K 군이 눈에 들어오더라도 얼른 다른 데를 봐야 하고, 얼굴을 오래 쳐다보지 말라고 말이다.


그날 오후. 유치원에서 돌아온 시뽀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핫서방과 내 당부에도 불구하고 K 군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는 거였다.


"뭐? 왜? 뭐라고 했는데?"

"어제부터 안경 쓰고 왔지? 나도 안경을 써보고 싶은데 안경이 없어. 그래도 바다에 갈 때는 선글라스를 쓰는데, 내 선글라스는 핑크색이야. 네 안경은 파란색이구나. 나도 다음에는 파란 색을 쓰고 싶다. 그냥 이렇게 말했는데."


핫서방과 나는 기겁을 했다. 헉....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피곤한 일에 휘말리면 어쩌지?

그때. 라인 대화방에 새 메시지가 들어왔다는 알림이 울렸다. K 군 엄마였다.


"오늘 아이가 교실에서 안경에 대한 칭찬을 들었다고 합니다. 파란 안경이 멋있다는 말을 듣고 집에 와서 자랑을 했습니다. 모두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안심하고 아이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핫서방과 나는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도했다.

그리고 느꼈다.

애초에 아이들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뻔했다고.





하원 후 놀이터로 달려간 아이. 오냐. 다음에는 파란 선글라스로 하자.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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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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