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공공기관은 한국 책 출간에 얼마나 협조적일까
일주일 전, 존 레넌에서 하루키까지 예술가들의 문화 살롱 <도쿄 킷사텐 여행>이라는 책을 펴냈다. 일본으로 이주한 지도 어느새 10년. 나에게 킷사텐은 가장 보통의 일상이자 삶의 일부다. 그런데 일본 카페에 대한 책은 많아도 킷사텐에 대한 책은 한 권도 없는 것이 아닌가. 책이라는 생태계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킷사텐에게 가장 처음으로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다.
이제는 여행자에게도 사랑받고 있는 킷사텐의 매력은 단지 레트로 감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오는 프랑스 카페처럼 킷사텐 역시 예술가가 모이는 낭만 살롱이었는데, "그냥 다방인 줄로만 알았던 킷사텐이 이런 데였다고?" 하고 깜짝 놀랄만한 스토리가 도쿄 곳곳에 비밀스럽게 새겨져 있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이야기에 홀려 지난 2년간 자료조사와 취재에 푹 빠져 지냈고, 일본 사람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발굴해 엮은 것이 이번 책이다.
이 책에 소환된 예술가는 사카모토 류이치, 무라카미 하루키, 다자이 오사무, 나쓰메 소세키, 미야자와 겐지, 후지코 F 후지오 등. 놀랍게도 3.1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도 나온다.
이들이 킷사텐에 모여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그 킷사텐은 어디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빠질 수 없었던 것은 사진. 오늘날의 도쿄를 여행하며 꼭 가봐야 할 킷사텐 사진은 직접 찍어 실을 수 있었지만, 옛 예술가들의 흔적은 해당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일본 공공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생각을 정리해 글로 잘 다듬기만 하면 되었던 첫 책과는 다른, 완전히 처음 경험해 보는 새로운 관문이었다.
사진을 달라고 한다고 순순히 줄까?
그런데 어디로 연락해야 하지?
1) 일단 내가 싣고 싶은 사진이 무엇인지 결정하고
2) 그 사진을 보유한 기관이 어디인지 파악해
3) 사진 제공을 부탁하는 것이 일의 흐름이었는데, 다행히 문학관이나 미술관 등 대부분의 일본 공공기관은 자료를 제공받고 싶은 사람이 손쉽게 연락할 수 있도록 담당부서 연락처와 신청방법을 홈페이지에 기재해 놓은 경우가 많았다.
뭐야, 굉장히 까다로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잖아?
더 놀라운 것은 담당자들의 태도였다. 막연히 방어적인 태도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한국에서 낼 책에 사진을 싣고 싶다"라는 문장 중에서 '책'이라는 한 단어가 들어간 것만으로도 모든 허가가 프리패스였다. 10여 개 기관에 자료를 요청하면서 느낀 것은, 이들이 (아직 나오지도 않은) 책을 거의 문화유산급으로 대하며 최대의 협조를 해준다는 사실이었다. 이 사람들이 나를 뭘 믿고 이렇게 사진을 막 주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다만 그 협조에도 유형이 있다는 사실이 재밌어서 후기 삼아 기록해 본다.
비슷한 요청을 해야 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나의 경험을 남겨보자면.
흔히들 일본을 매뉴얼 사회라고 한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나는 이런 특징을 가진 일본과 잘 맞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담당자 혹은 그들의 기분에 따른 변수가 발생하는 곳보다는 상식 선의 매뉴얼이 잘 갖추어져 있는 곳이 오히려 편하다.
1) 홈페이지 혹은 이메일을 통해 신청서 다운로드
2) 저자, 출판사, 책에 대한 간략한 정보 입력
3) 신청서 제출 및 허가 취득
4) 비용 지불 및 사진 수령
이렇게 물 흐르듯 그냥 매뉴얼 흐름에 따라 착착 진행되는 곳으로는 아오모리현 근대문학관이 있었고, 여기서는 다자이 오사무가 그린 수채화 사진을 제공받았다.
절차에 있어서는 1번과 동일하지만 사진 수령 방법이 독특한 유형.
그냥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주었던 아오모리현 근대문학관과는 달리 일본근대문학관은 인화된 사진을 우리 집으로 보내주었고, 스캔한 후 우편으로 다시 돌려달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신주쿠구 역사박물관은 사진을 CD에 넣어 우리 집으로 보낸 후, 파일을 복사하고 나면 다시 택배로 보내달라고 했다.
두 기관 모두 절차 측면에서는 다소 번거로웠지만 태도 측면에서는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어 하는 곳들이었고, 책에 대한 격려와 응원을 해주어서 마음이 고마웠다.
매뉴얼형, 배송형에 익숙해져 있다 보면 이 유형과의 만남이 실로 당황스럽다.
어느 날 모나미라는 킷사텐을 조사하던 나는 도쿄 나카노 중앙도서관에서 발간한 PDF 자료 속에서 모나미 사진을 발견했는데, 사진 소장처가 세타가야미술관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세타가야미술관에 메일을 보내 어떤 절차를 거쳐야 이 사진을 제공받을 수 있냐고 물으니 돌아온 대답.
"네, 따로 절차는 필요 없고요. 그냥 PDF에 있는 사진 복사해서 실어 주세요."
이게 끝이었다.
공공기관은 아니지만 도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카페인 파울리스타도 이런 유형이었다.
파울리스타는 유독 많은 화가들의 손을 통해 그림으로 남겨졌는데, 나는 일본 시티 팝 아트 일러스트레이터 와타세 세이조가 그린 파울리스타 그림을 책에 꼭 싣고 싶었다.
파울리스타에도 메일을 보내 사진 제공을 부탁드렸고, 파울리스타 측에서는 어떠한 신청서나 연락처도 요구하지 않고 "표지에 들어가나요, 삽화에 들어가나요? 크기가 어느 정도 되어야 하죠?" 하는 질문 하나만 던진 후 답메일로 파일을 바로 송신해 주었다.
3번과 가장 대조적인 유형. 이 역시 모나미 PDF자료에서 본 사진에서 출처가 '오카모토 타로 기념관'이라고 되어 있길래 연락해 봤더니, 책에 들어가기 좋은 다른 사진까지 열심히 찾아서 게재를 제안해 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이 애쓴 만큼의 동등한 노력을 나에게도 요구한다는 것. 사진이 실리는 페이지에 어떤 원고가 들어가는지 일본어로 번역해서 제출하라고 했고, 내용상에 문제가 없어야지만 사진을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게다가 내가 오카모토 타로 기념관에서 직접 촬영한 사진도 책에 실을 수 없다고 했는데, 기념관 측에서 찍은 공식 홍보사진 중 원고 내용과 잘 어울리는 사진을 골라줄 테니 그것을 실으라는 것이 아닌가.
사진은 우편 등등의 절차가 아닌 메일로 전송받았지만, 배송 형태가 무엇인지를 떠나서 원고 내용 및 사진 선택권까지 관여하는 보기 드문 기관이었다.
그런가 하면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100년 전 간행물 사진은 의외로 자유롭고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법적으로 사진을 촬영한 당사자가 사망하거나 간행물이 발간된 지 70년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기 때문. 그리하여 100년 전 킷사텐의 모습은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판본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기관에 따라 유형도 참 가지가지. 다양한 기관의 다양한 요구에 응하는 과정을 거치느라 절차가 좀 복잡했지만, 그 덕분에 지금 시대의 아름다운 킷사텐 사진과 더불어 예술가들의 살롱으로서의 킷사텐 사진까지 실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기관은 출간 후 책 한 권씩을 보내주기를 부탁했기에 이제는 내가 그 요청에 응답할 차례. 감사의 메모를 동봉해 책을 보내드려야겠다.
'책'이라는 한 단어만 믿고, 누구인지도 모를 나에게 사진을 보내준 고마운 담당자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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