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동떨어진 공간이 아닌, 시대에 맞서는 공간
모든 도시에는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 시시각각 달라져서 사랑받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 모습 그대로이기에 사랑받는 곳도 있다. 교토는 후자다.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제 모습을 바꾸지 않는 곳. 온몸으로 세월을 품고 있는 곳. 그런 의미에서 교토는 킷사텐을, 킷사텐은 교토를 닮았다.
마에다 커피, 이노다 커피, 스마트 커피 같은 로컬 킷사가 뿌리내릴 수 있었던 까닭도 교토라는 토양 덕분은 아니었을까. 그런 교토에는 자신의 일부를 간직한 킷사텐이 숨 쉬고 있다. 1934년 가을 문을 연 프랑수아 킷사실(フランソア喫茶室)이다.
교토 중심인 가와라마치 역과 기온시조 역 사이. 다카세 강이라는 작은 개울을 따라 골목길로 들어서면 고풍스러우면서도 작은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대문에 달린 등불에는 프랑스 국기가 그려진 휘장과 함께 'FRANCOIS'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등불 아래 나직한 문을 열고 발을 들이면 흑백사진의 시대로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는 듯 순식간에 시공간이 전환된다.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에서 따 왔다는 프랑수아라는 이름, 이탈리아 여객선을 표현했다는 내부, 교토 유리 장인이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공간에 자연스레 녹아든 그림과 음악.
프랑수아는 교토의 지난 100년을 간직한 국가 지정 유형 문화재로, 2021년 교토 교세라 미술관 <모던 건축의 교토> 전시에서 프랑수아의 건축과 가구를 다룰 정도였다. 말 그대로 '킷사텐 이상의 킷사텐'. 킷사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자 문화재가 된 것이다.
"어서 오세요.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으세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직원이 건네는 메뉴판을 받아 든다. 의자에 앉은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는 메뉴판이다. 직원에게 이 그림은 누가 그린 거냐고 물으니 교토 출신 판화가 아사노 타케지의 작품이라고 하며 친절하게 메모지에 이름을 적어 준다.
'프랑수아의 화가' 하면 옛 메뉴판 그림을 남긴 후지타 쓰구하루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 후지타 쓰구하루는 대외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 출신 화가로, 파리시립현대미술관이나 퐁피두센터에서도 그의 프랑스 이름인 레오나르도 후지타(Léonard Foujita)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군의관이었던 후지타의 아버지는 작가이자 군의관 모리 오가이의 후임이었다. 그런 인연 때문일까. 후지타는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도쿄 미술학교를 다니다 파리로 이주해 작품을 그렸다.
스페인에서 온 피카소, 이탈리아에서 온 모딜리아니는 후지타의 몽파르나스 친구이자 동료였다.
시간이 흘러 20년 만에 일본을 찾은 후지타 쓰구하루는 도쿄 간다에 있던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서 길진섭, 김병기, 김환기 화백에게 그림을 가르쳤고, 1935년에는 서울에서 다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오사카 소고 백화점과 교토 마루쓰부 백화점 벽화 작업을 위해 간사이에도 머물렀는데, 바로 그 시기에 프랑수아 단골이 되었다. 아무래도 킷사텐을 꽤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도쿄 킷사텐 코롬방 천장 벽화도 그렸던 것을 보면 말이다.
프랑수아 2대 마스터 인터뷰에서 옛 사진 속 아버지 머리 모양이 후지타 쓰구하루와 똑 닮았다고, 아무래도 아버지가 그 머리 모양을 따라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을 보았다.
김병기 화백도 박태원 소설가도 프랑수아의 주인도 '오갓파 헤어'라 불리던 후지타 쓰구하루 스타일을 했다고 하니, 후지타는 화가이면서도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플루언서에 가까운 존재이지 않았을까.
그는 어떤 자리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갓파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그가 어딘가에 앉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커피잔을 쥐고 말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오래된 킷사텐은 과거를 상상하는 묘미로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먼 과거의 사람들과 지금의 내가 공간을 매개로 연결되는 기분이 든다.
'예술가 손님과 교류했을 정도면 프랑수아 주인도 예술가였을까?'
아니나 다를까, 프랑수아의 마스터인 다테노 쇼이치도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기는 했다.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교토에 있는 공방에서 도자기에 그림 새겨 넣는 일을 했다니 말이다.
그런데 그가 일하던 공방에서는 도공과 예술가에게 무리한 일을 시키면서도 그에 맞는 대우를 하지 않았고, 일하는 시간은 엿가락처럼 늘리면서도 임금은 무토막처럼 잘랐다. 교토에 있는 다른 일터도 마찬가지였다. 직물 공장이나 염료 공장에서도 공장주들은 직원을 폭행하거나, 하루아침에 자르거나, 월급을 떼어먹었다.
다테노는 붓을 내려놓고 노동운동가가 되기로 한다. 교토 시내를 누비며 억울한 일을 겪은 부락민이나 노동자를 도왔는데, 노동자 중에는 교토의 표백 공장이나 벨벳 공장에서 일하던 조선인도 있었다.
다테노와 동료들은 여성, 젊은이,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를 지원하면서도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놀랍게도, 프랑수아라는 킷사텐을 연 이유 역시 반 파시즘 활동 자금을 마련하고 활동가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킷사텐이라는 공간이 생기자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기도 한다.
일본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유키와 히데키, <천황가의 역사>를 쓴 역사학자 네즈 마사시, 언어학자 신무라 타케시 등 프랑수아 단골이었던 진보 지식인들은 교수나 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을 위한 문화 잡지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 무렵 프랑스에서 앙드레 지드와 로맨 롤랑이 <금요일>이라는 인민 전선 기관지를 펴낸 것을 본 이들은 <토요일>이라는 이름의 격주간지를 만들어 교토 노동자들의 르포 기사를 실었다. 이를테면 이런 기사였다.
시미즈 히로시 감독이 만든 <아리가토상(有り難うさん)>이라는 영화 속에는 이즈 반도의 산속에서 도로 개통에 종사하고 있는 반도 출신 동료들이 찍혀 있다.
그 영화에 의하면 조선 사람들은 절벽을 자르고, 산을 뚫고 겨우 자동차 도로를 개통시켰나 싶을 사이도 없이 자신들은 그 버스를 타지 않고 다음 일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어 옮겨가는 것이다.
1936년 1월 5일 자 <토요일> 제22호
'반도 출신 사람들의 일과 지위'
후지산 아래에 달린 이즈 반도는 산세 험한 첩첩산중이다. 언제였던가, 취재를 위해 이즈 반도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며 '이런 산에 용케도 길을 냈구나' 하고 입을 쩍 벌린 일이 있지만 그 길을 낸 사람의 얼굴은 상상하지 못했다.
프랑수아의 지식인이 기록하고 보존한 글 속에서야 비로소 그들이 나와 같은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 시절 <토요일>의 역할도 '모두에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교토 상인들은 잡지에 광고를 싣는 방식으로 <토요일> 발간을 후원했고, 프랑수아는 테이블마다 <토요일>을 올려두고 손님 누구나 자유롭게 읽게 했다.
사람들은 이 잡지를 보기 위해 프랑수아를 찾았고, 잡지는 이름을 알리며 인쇄 부수를 늘려 갔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에 프랑수아는 <토요일> 잡지를 중심으로 학자와 학생과 노동자와 상인이 생각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이런 활동은 당시로서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시대는 1930년대. 일본은 강압의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국가의 질서에 반대하는 생각을 가진 학생과 지식인은 치안유지법으로 처벌을 받았다.
윤동주 시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법안도 치안유지법이었는데, <토요일> 역시 이 법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고 프랑수아를 찾던 지식인들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다.
프랑수아를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우아함을 지향하는 킷사텐이라고만 생각했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주인과 손님, 유럽풍의 건물, 근사한 내부, 커피와 클래식 음악. 별다른 걱정도 고민도 없이 아름다움만을 제일로 여기는 사람들의 공간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나 프랑수아의 주인과 손님들은 누구보다 현실에 치열하게 맞서는 사람들이었고, "교토를 군국주의의 거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파리처럼 자유롭고 민주적인 분위기의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생각해 어두운 시대에 저항하는 마음으로 공간을 더 밝게 꾸몄다.
1941년에 이전한 지금의 공간은 이탈리아에서 온 유학생 벤치벤니가 호화 여객선을 떠올리며 설계했고, 스테인드글라스는 화가 다카기 지로가 디자인한 것을 교토 나카야마 유리점에서 제작했다.
음악도 공들여 선곡했다. 성악가이자 작사가인 세키 다다스케가 손님들에게 들려줄 음악을 손수 골랐다. 그러자 학생 손님들은 프랑수아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모임을 만들었다. 시국이 그러한데 웬 예술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런 때야말로 예술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국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시기, 대학생 손님들은 징병이 되어 전쟁터로 내몰리고 프랑수아는 상호명이 적성어(敵性語)라는 이유로 이름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프랑수아가 '준킷사 도차방(都茶房)'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던 그때, 킷사텐 내부에는 사복 경찰이 상주하며 손님이 불온한 대화를 하지는 않는지 엿듣기도 했다.
프랑수아 메뉴판에서 후지타 쓰구하루의 그림이 사라진 것도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일제는 화가와 작가, 배우 같은 예술인들에게도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선전하는 작품을 만들게 했다. 몇 할의 강제와 몇 할의 자의가 섞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지타는 태평양 전쟁의 종군 화가가 되어 전쟁화를 그렸고, 훗날 "당신은 그림으로써 전쟁에 동참한 것이 아니냐!" 하는 동료 화가들의 비판을 등에 이고 프랑스로 떠나 영영 고국에 돌아오지 않는다.
후지타가 종군화가 아닌 자화상과 고양이만 그렸더라면 어땠을까. 후지타와 프랑수아는 같은 길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2003년, 그런 날들을 견뎌 낸 프랑수아는 킷사텐 중에서는 최초로 '국가 지정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킷사텐 입장에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지 않을까? 한때는 자신의 존재를 눈엣가시로 여기며 철저하게 감시하던 국가가 이제는 문화재라는 이름을 붙이고 세상 귀하고 소중하게 대해 주니 말이다. 킷사텐도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더 화려하고 감각적인 공간이 많은 요즘, 모던한 커피 스탠드나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러운 호텔 라운지에 비하면 비하면 프랑수아는 오히려 소박해 보인다. 낮은 천장, 작고 좁은 식탁, 팔걸이가 닳아 나무 속살이 드러나는 의자를 보면 "여기가 정말 호화 여객선을 본뜬 거라고?" 하는 물음표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더없이 화려했던 모든 것들이 시간을 관통하며 골동품이 되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 100년 전의 화려함은 이제 엔티크함으로 변했다. 그런 시간을 거친 지금의 프랑수아에는 화려하기보다는 고상한 멋이 있다. 모든 문화재가 그런 것처럼.
공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구석 자리에 앉아 프랑수아를 바라본다.
치열한 시간 속에 살아남은 프랑수아는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인생의 풍파를 견뎌낸 노파가 햇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뜨개질을 하다 깜빡 잠이 들고 말 것 같은, 그런 공기만이 흐른다.
할머니가 손녀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듯 프랑수아도 오래도록 이 자리에서 옛 교토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밝은 공간이 있었기에 어두운 시대를 지날 수 있었다고 알려주기를.
프랑수아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평온한 오전 시간이 흘러간다.
* 이 글은 <도쿄 킷사텐 여행> 집필 중에 썼지만 책에는 실리지 않은 미공개 원고를 손보아 올린 것입니다.
** 일본식 상호명은 '프랑소아(フランソア)' 이지만,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우리말 표기에 맞추어 킷사텐 이름도 프랑수아로 기재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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