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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할머니의 사랑론(論)

말하지 않는 사랑

by 최민지

밤새 내리던 부슬비가 고요하게 이어지는 아침. 날이 맑아도 궂어도 하루가 시작되는 모습은 늘 같다.

학교 가는 아이를 배웅하고, 도시락통에 무언가 점심때 먹을 만한 것을 담고, 남편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며 삼십여 분 수다를 떨다가 시간이 되면 총총 지하철에 오르는 매일매일. 이런 날이 지하철 노선도 속의 둥근 순환선처럼 돌고 돌고 또 돈다.


남편 출근은 나보다 늦어서 오전 집안일은 그가 책임지는데, 밤새 동나버린 고양이님의 물그릇과 밥그릇을 부지런히 채우다가도 "다녀올게!" 하는 내 목소리가 들리면 젖은 손을 대충 훔치고 쪼르르 복도를 따라서 현관으로 나온다.


옆으로 긴 복도식 맨션이지만 엘리베이터는 우리 집 코앞. 남편은 슬리퍼를 꿰어 신고는 왼쪽 어깨에는 종이 뭉치며 노트북이 든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는 도시락 가방을 균형 좋게 짊어지고 까치집 지은 머리로 배웅을 나온다.

엘리베이터가 6층에 멈추면 가방을 건네며 손을 크게 흔든다. "민짱, 잘 다녀와! 오늘도 힘내!" 하고.


오늘 현관문을 열었을 때는 흐리게 흩날리는 안개 같은 빗방울을 배경으로 옆집 할머니 얼굴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 머리 자르셨네요! 단발머리 하시니까 귀여워요. 잘 어울리네요. 소녀 같아요."

"2개월에 한 번씩 미용실에 가는데 어제 다녀왔지. 이번엔 좀 더 짧게 잘라달라고 했어. 귀엽다는 말을 들으니까 기쁜 걸!"

할머니는 아동관에 자원봉사를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자원봉사라고는 하지만 이 쪽에서 봉사하는 것보단 오히려 저 쪽으로부터 받는 것이 더 많다는 말도 덧붙였다.


"외출? 둘이 같이 나가는 거야?"

할머니가 물었다.

"아니요. 저는 도서관 가고요. 남편은 그냥 잠깐 배웅 나왔어요."

"보기 좋아라. 두 사람은 언제나 방긋방긋 미소네."


지난주도, 지지난 주도 할머니를 만나 수다를 나누기는 했지만 오늘은 오늘의 수다가 있는 법. 엘리베이터에서 할머니는 내가 지금 읽는 책이 무엇인지 물어왔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책으로 이어지는 듯하다가 갑자기 웬 사랑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 아들도 책을 좋아하는 아이인데, 나랑 책 얘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나 봐. 그런데 나는 눈이 피로해서 작은 글씨를 읽기 어렵거든. 그럴 때 아들이 자기가 읽은 책 내용을 요약해서 나한테 보내 주곤 해.

그런 아들을 보면 세상에는 말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게 공기처럼 떠 다닌다는 걸 느껴. 사랑은, 물론 단어나 문장으로도 표현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로 주고받는 사랑이 더 많지 않을까?

연세 든 어머니에게 책 줄거리를 정성껏 알려주는 자식의 마음도, 열 발자국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배웅을 나오는 사람의 마음도 말하지 않는 사랑이야."


깡충 발랄한 단발머리를 한 할머니가, 내가 꺼내 든 수박 무늬 우산이 귀엽다고 환하게 좋아하는 할머니가, 아침부터 이렇게 예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가, 비 오는 날은 들풀 빛깔이 선명해서 기분이 맑다고 말하는 할머니가, 나는 더 좋아졌다.


"어디에 있는 아동관으로 가세요? 저는 지하철을 저기 저 쪽 출구에서 타요."

"응, 나도 그리로."

할머니는 빠른 지름길 대신 지하철역을 지나 빙 돌아가는 길을 가리켰다.


"다 왔네. 아침부터 내가 너무 많이 말해 버리고, 실례가 많았어요. 그럼 바이바이!"

어쩌다 보니 할머니가 나를 지하철 역까지 바래다주고 가신 형국.

그러고 보면 비 오는 날 더 오래 우산을 들고 함께 걸어주는 것도, 어제 만난 서로와 오늘도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도 '말하지 않는 사랑'이 아닐까.


정말 그러네. 좋아한다는 말을 단어로 문장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세상에는 '말하지 않는 사랑'이 공기처럼 떠 다닌다.




도서관 앞. 맑은 날의 민들레.
같은 장소. 빗방울에 숨어 버린, 그렇지만 더 선명한 초록 빛의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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