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극장에서>(2017)
처음 독립예술영화관에 갔던 날을 아주 선명히 기억한다. 지금은 사라진 광화문 스폰지하우스였다. 늘 바쁘게 북적이는 빌딩 숲 사이에 위치해있어 공간이 가진 여유와 고요가 더욱 빛나는 곳이었다. 작은 스크린에는 내가 여태껏 봐온 어떤 영화들과도 비슷하지 않은 영화가 흘러나왔다. 객석에는 나와 일행을 제외한 관객은 세 명뿐이었고, 짧은 시간이지만 영화에 함께 오롯이 집중한 그들에게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기억 속에 간직되어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2016년 스폰지하우스는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폐관했고, 추억 속의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독립예술영화관은 멀티플렉스와 OTT에 밀려나며 끊임없이 위기를 겪어오고 있다. 이렇게 극장을 외면해온 것이 관객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기에 직면한 극장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늘 관객들이었다. 경영난으로 폐관했던 인디스페이스가 영화인들과 관객들의 후원으로 재개관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최근 독립예술영화관은 코로나로 인해 큰 위기에 봉착하자 관객들은 또다시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하나가 독립예술영화관을 응원하는 SaveOurCinema의 후원 캠페인이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독립영화 세 가지를 선정해 소개하거나, 독립예술영화관에 담긴 추억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 캠페인은 많은 관객의 참여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관객들이 이토록 독립예술영화관을 사랑하고 지켜내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너와 극장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좋은 해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너와 극장에서>는 서울독립영화제의 신진작가 지원 프로젝트 ‘인디트라이앵글’을 통해 제작되었다. ‘극장’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세 명의 신인 감독들이 각각 제작한 단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극장들은 모두 독립예술영화관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실 신인 감독들이 자신이 평소 만들어내고 싶었던 작품들을 시도하기 위한 창구가 되는 프로젝트이다 보니, ‘극장’이라는 소재가 중심이 되는 영화는 마지막 에피소드인 ‘우리들의 낙원’ 뿐이다. 그럼에도 <너와 극장에서>가 독립영화에 대한 헌정작인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독립영화의 새로운 얼굴들이 한자리에 모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독립영화계에는 이렇게 재능 있는 배우와 감독들이 있다’라는 자부심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는 특히 두 번째 에피소드인 정가영 감독의 <극장에서 한 생각>에서 잘 드러난다. 정가영 감독은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 로맨스 영화로 매니아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감독의 여느 작품들이 그렇듯 주인공의 이름은 ‘가영’이고, 극 중 가영은 영화감독이다. 가영은 이봄씨어터에서 자신의 영화 <극장 살인사건>의 GV에 참석하고 관객에게 자신의 불륜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가영과 불륜을 저지른 유부남이 자신과 있었던 일이 영화로 만들어질까 두려워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관객은 가영이 영화가 실화인지 허구인지를 명백히 밝히지 않는 것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고 몰아붙인다. 그러자 그녀는 품에서 권총을 꺼내 관객 쏜다. 그리고 이어 극 중 가영이 만들었을 로맨스 영화가 이어진다. 메타 영화는 유부남이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 소재로 사용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며 끝이 난다.
영화에는 정가영 감독이 GV에서 받아온 압박감을 담아내고 있다. 정가영 감독은 늘 자신의 영화에 ‘정가영’이라는 실명으로 비슷한 인물들을 연기해왔다. 게다가 그 가영들은 홍상수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처럼 끊임없이 상대에게 수작을 걸고 유혹하는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영화 속 인물인 가영들과 실제 정가영 감독이 얼마나 맞닿아있는지는 관객들에게 큰 이슈가 되어왔다. 그리고 GV는 항상 감독의 사생활에 대한 질문이 난무했다.
극 중에서 가영은 GV에서 영화가 실화냐고 묻는 관객에게 그 질문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질문에 답변하는 내내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에 자신을 담아내는 일에 대한 고민, 이로 인해 극장에서 관객들을 마주할 때의 부담감을 드러낸다. 결국 그 부담은 창작 과정에서 관객을 배제하는 것으로 해소된다. 이는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영화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통해 앞으로 자신을 향한 시선들에 대해 어떻게 맞서 나갈지를 보여주는 은유다. <극장에서 한 생각>은 정가영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다른 장르와 분명한 메시지를 통해 전달하는, 감독이 앞으로 만들어나갈 새로운 작품들에 대한 선언인 것이다. 이토록 신선하고 실험적인 구조, 그리고 단단한 메시지는 정가영 감독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별은 액자 밖의 영화에서 감독의 대변인이 된 이태경 배우이다. 독립영화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얼굴에서는 분명히 익숙함을 느낄 것이다. 10여 년 간 스무 편을 훌쩍 넘는 영화들에 주·조연으로 활약해온 그녀는 따뜻한 듯 강렬한 눈빛과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짝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감정에 잔뜩 휘둘리는 여자를 연기한 <제 팬티를 드릴게요>부터 레즈비언 커플을 연기한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는다>, 성녀가 되기를 강요당하는 목사의 딸 <안나>까지. 이토록 특색 있는 작품들에 출연하며 다채로운 연기를 보여온 배우지만 해당 작품에서는 더욱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한 인터뷰에서 이태경 배우는 의도적으로 연기 변신을 꾀한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이를 보아 여태까지 출연한 작품들과 다른 결을 가진 정가영 감독의 작품에 잘 녹아들었기에 나타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이유는 마지막 에피소드인 <우리들의 낙원>이 주는 메시지이다. 이 작품은 사실상 인디트라이앵글에서 설정한 ‘극장’에 대한 메시지를 가장 잘 담고 있는 에피소드이다. 영화에는 주인공 민철의 사정이 자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언뜻 보아도 그는 현실에 많은 어려움을 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극장에서만큼은 자신의 소신과 생각과 취향에 오롯이 집중한다. 극 중에서 민철과 은정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를 본다. 영화의 제목이 에피소드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카프라의 영화는 행복과 순수와 이상을 그린다. 그들이 영화를 보는 극장이 낭만과 행복을 안기는 장소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재밌는 건 서울아트시네마가 예전에 위치했던 곳이 ‘낙원상가’라는 사실이다. ‘우리들의 낙원’이라는 제목은 여러모로 영화 전체와 자연스럽게 결이 맞아떨어지며 영화의 매력을 더한다.
이 영화가 독립예술영화관에 대한 러브레터인 마지막 이유는 세 극장이 가진 개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대구지역의 독립 예술공연과 전시가 이루어지는 복합예술공간인 오오극장, 작지만 감성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상영관을 가진 이봄씨어터, 그리고 고전 예술영화를 상영해 시네필의 집합소가 되는 서울아트시네마까지. 천편일률적인 멀티플렉스와 차별화되는 독립예술영화관들만의 매력이 카메라 너머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만일 멀티플렉스들이 그 배경이었다면 이런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펼쳐질 수 없었을 것이다.
<너와 극장에서>의 에피소드들은 공통적으로 독립예술극장들이 마주한 어려움에 대해 말한다. 오오극장은 관객들을 모으기 위해 사은품까지 준비해야 했고, 이봄씨어터의 GV에서는 넷플릭스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고, 서울아트시네마는 서울극장의 한 켠에 세 들어 있어 처음 가는 이들은 찾아가기 어렵다는 공간적 열악함을 가지고 있다. 관객들이 우리들의 낙원인 극장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부분이다.
언제든 쉽고 편리하게 영화를 소비할 수 있는 시대이다. 어디서든 영화가 상영되고 소파 한 구석도 영화관 1열이 된다. 그렇지만 불편해도 지켜나가야 할 가치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너와 극장에서>가 이야기하듯 독립영화는 늘 실험성을 통해 상업영화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도록 하는 나비의 날갯짓 이어왔고, 스크린을 이끌어갈 차세대 주역들이 성장하는 발판이 되어왔다.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왔다.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조금 낯설더라도 독립영화를 보고, 조금 멀고 불편하더라도 독립예술극장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아주 오래도록 기억될 영화로운 순간을 마주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