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건축가 Nov 17. 2024

최종 마감 1

그 여름의 공모전 #12

오늘은 마감 전날 밤이다. 며칠 전 패널 마감을 끝낸 친구들이 이제는 모형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스리디 프린터가 바쁘게 돌아가며 모형을 만들고 있고, 한쪽 테이블에서는 열심히 칼질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아, 뭐야 잘못 잘랐잖아..  응? 피가 나네?“

”수진아? 왜 그래? 어? 피가 나잖아? 많이 베었어?“

”아.. 괜찮아.. 다행히 많이 벤 건 아니고.. 약간 베긴 했어. 약 바르고 반창고 붙이면 될 것 같은데..“

”조심해야지.. 빨리 약국 가봐. “

”해야 할 것도 많은데.. 참. 죽겠네..“     


밤새도록 모형을 만들다 보면 새벽 즈음에는 정신이 몽롱해져서 칼질을 잘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모형 제작에 쓰이는 NT 커터는 워낙 날카롭고 예리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큰 부상을 이어지기 쉽다. 손가락을 잘못 베어서 응급실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10시쯤 돼서 창민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무리 창민이라고 해도 10시면 마감 전날에 집에 가는 시간으론 너무 빠르긴 했다. 보통 밤을 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창민의 작업은 모두 마무리가 돼서 모형과 패널이 완료된 상태이긴 했다.     


”창민아. 벌써 가려고? 역시 넌 대단하다.. 마감 전날 10시에 집에 가다니..“

”패널이나 모형이나 다 했으니까. 그동안 무리했으니까 좀 쉬고 발표준비 하려고.“

”나도 그런 멘트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앞으로 모형에 붙여야 되는 루버(창문 주변에 햇빛을 가리거나 하는 목적으로 붙이는 차양)가 한 500개는 되는 거 같은데.. 밤 꼴딱 새도 될까 말까다..“

”힘 내고. 그래도 레이져 커팅 해서 다 잘라놓긴 했잖아.“

”그런데 이걸 유리에 깔끔하게 수직으로 잘 붙이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 붙였다 뗀 것만 벌써 수십개는 되는 거 같네..“     


사실 창민이 이렇게 빨리 집에 가는 것은 미나의 작업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 저것 해주다 보니 다이어그램까지 그려줘야 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내일 아침에 출력소에 맡기려면 아무리 창민이지만 밤을 새면서 해야 될 정도다. 창민은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한숨이 나왔다.     


‘내가 어쩌다 저런 애한테 엮여서 마감 전날까지 남의 일을 도와 주고 있는 건지, 원... 미나는 오늘까지도 오디션 연습을 한다고 하던데. 무슨 생각으로 설계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아무튼 해주기로 한 거니까 이번까지만 해주자.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방학 때 나를 좀 만나주지 않을까?’     


창민은 지수의 자리를 지나치면서 지수의 모형을 보았다. 3D 프린터나 레이져 커팅을 쓰지 않는데도 굉장히 깔끔하고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모형이었다. 사실 창민은 컴퓨터 작업보다 모형 제작같은 아날로그 작업에 서투른 편이다. 그래서 더욱 3D 프린터에 의존하는 버릇이 생겼다. 지수와 같이 멋진 모형을 만드는 것은 창민에게도 참 부러운 능력이었다.     


“와.. 지수야, 너 모형 진짜 잘 만든다. 엄청 깔끔하게 만들었네. 나무 같은 것도 굉장히 잘 썼어. 대단하다.”

“아, 그래? 니가 칭찬해주니까 힘이 나네. 고마워 창민아. 넌 다 했어? 벌써 가는 거야? 그래도 마감 전날인데..”

“응.. 그 동안 좀 무리한 거 같아서. 웬만큼 정리됐으니까 집에서 좀 쉬면서 내일 발표 준비하려고.”

“너야 이미 엄청 엄청 많이 했으니까. 충분히 그럴 만 하지. 그래, 고생했어. 내일 보자.”     


다음 날. 최종 발표날이 되었다. 마지막 마감일은 한 학기 설계작업을 마무리하는 날이기 때문에 가장 분주한 날이고, 들뜨는 날이기도 하고, 학생들로서는 가장 피곤한 날이기도 하다. 중간발표와 비슷하게 각자의 패널과 모형을 앞에 놓고 교수님들 앞에서 발표를 하고 크리틱을 듣는다. 보통 모든 학생들의 평가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한 학생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5분에서 10분 정도로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한 학기동안 해왔던 작업을 최종적으로 평가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가장 긴장되고 신경 쓰이는 자리임에는 틀림 없다. 지도해준 교수님 외에 다른 교수님까지 함께 모여서 크리틱을 하고, 외부 강사님까지 초빙해서 크리틱을 하는 경우도 많다.      


크리틱을 시작하기로 한 시간은 10시였다. 예린과 수현은 여유 있게 30분 전쯤에 도착해서 학생들의 작업을 주욱 둘러보고 있다. 창민처럼 굉장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친구도 있지만, 미나처럼 함량 미달의 작업물을 보여주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창민은 역시 독보적인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었다. 웬만한 5학년 학생의 졸업 설계를 방불케 할 정도의 퀄리티와 양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 학년을 둘러보아도 창민 수준의 설계를 한 친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창민이는 잘 했구나. 전 학년에서 제일 잘 했네. 거의 독보적인거 같은데..”

“그러게. 다른 반에서도 창민이를 따라올 친구가 없어 보여.”     


민호의 작품도 훌륭했다. 창민의 작품이 조금은 급진적이고 자하디드 같은 해체주의적인 냄새가 난다고 하면, 민호의 안은 호불호가 없는, 문안하게 모던한 안을 발전시켜 왔다. 4.3그룹 선생님들이 생각나는 계획안이었다.     


“민호도 잘 했지. 창민이가 조금은 더 했다고 보이긴 하지만.”

“창민이랑 스타일이 좀 다른 거지. 모던한 박스 스타일로 꾸준히 해왔으니까. 다만 창민이가 워낙 프로덕트를 엄청나게 해오니까.. 그걸로 보면 확실히 창민이가 더 잘했다고 볼 수 있겠지.”

“음. 아무튼 이 두 명은 문안하게 A+을 줘야될 거 같네. 오늘 발표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지수는 모형을 정말 잘 만들어 왔다. 앞선 두 명보다 모형 퀄리티로만 보면 지수의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친구의 진짜 능력은 모형을 잘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형의 수준이 뛰어났다.     


“와.. 지수야. 너 모형 진짜 잘 만들었다. 이거 니가 다 만든거야?”

“네.. 제가 시다(모형제작을 도와줄 친구 또는 후배를 이르는 말)를 쓸 수 있는 입장이 못 돼서.. 제가 다 만든 거에요.”

“대단하다. 며칠이나 만든거야?”

“한 5일? 6일 정도.. 거의 잠 못자면서 만들었어요..”

“그래. 고생 많이 했네. 수고했어. 발표준비 잘 했지? 이따 기대할게.”

“네.. 근데 어제 거의 잠을 못자서..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지수와 대화를 마친 예린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수현과 대화를 나누었다.

“지수 모형 진짜 잘 만들었네.. 저 모형 퀄리티 때분에 점수를 더 높게 주고 싶을 지경이야.”

“그러니까. 난 B0? B+ 정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 B+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근데 저걸 보니 A를 줘야 하나? 고민이 되네.”

“에이.. 그래도 초중반에 많이 헤맨 게 있으니까 A까진 좀 무리인거 같은데..”

“그렇긴 하지. 아무튼 이따 발표하는 거 보고 생각해보자.”     


수현과 예린은 마지막으로 미나의 작업물을 보았다. 보나 마나 엉망진창으로 마무리해 왔겠지.. 싶었는데, 이게 웬걸. 패널이 생각보다 준수하다. 언제 이렇게 많이 했지? 싶을 정도다.     


“어라.. 미나가 생각보다 많이 해왔네. 언제 이걸 다 했지?”

“그러게.. 지난 주 판넬만 봐도 텅텅 비어 있어서 이걸 언제 다 채우나 했는데. 얼추 다 채웠잖아? 모형도 뭐 그럭 저럭 봐줄 만 하고.”

“난 미나는 빼도 박도 못하게 그냥 C0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잘 해와서 고민이 좀 되긴 하는데.”

“나도 미나는 C 줘야 겠다 생각하고 있었어. 근데, 저 패널 미나가 다 한거 맞아? 평소에 그 친구가 하던 거랑 좀 다른 스타일인 거 같은데..”

“얘가 뭘 해오던 게 있어야 스타일을 따지기라도 하지. 해온 게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뭔가 좀 달라 보여. 위화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뭐 남자라도 하나 꼬셔 가지고 도와달라고 했나 보지. 그거야 알아서 하는 거니까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냐.”     


사실 미나의 패널 수준이 갑자기 높아진 것은 순전히 창민이 자신의 시간을 갈아서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창민은 자신이 도와주는 걸 들키기 싫었기 때문에 자신의 패널 스타일과는 일부러 많이 다르게 미나의 것을 작업했다. 하지만 눈썰미 좋은 예린이 그것을 눈치챈 것이다.      


이렇게 수현과 예린이 작품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학년 주임인 지현이 다가왔다.

“예린아, 한 학기 동안 고생했어. 수현이도. 너희 반 애들 진짜 다 잘했던데. 못한 애가 거의 없어 보여.”

“그러니까. 미나가 좀 걱정이었는데.. 마지막 날에 스퍼트를 했는지. 퀄리티가 많이 올라갔네.”

“창민이나 민호는 원래 잘 하는 애들이고.. 지수도 정말 많이 좋아졌더라고. 모형을 진짜 잘 만들었던데. 너희들이 지도를 잘 해줘서 그런 거 같아.”

“에이, 뭘. 우린 방향만 좀 잡아 준 거지. 애들이 열심히 한 거야.”

“아냐. 고생 많았어.. 오늘은 내가 게스트 크리틱을 불렀어. 황창수 선배 알지? 현상설계 열심히 하고 있는. 이따 올거야.”

“아, 창수 선배 알지. 요새 당선 잘 되던데. 오랜만에 얼굴 보겠네.”

“암튼 오늘 크리틱이 많이 길어질 것 같은데. 부탁 좀 할게. 학생 한 명당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아. 짧게 짧게 코멘트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한 명당 시간이 5분씩만 늘어져도 30명이면.. 우리 학생 때처럼 새벽까지 크리틱 하고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아.” 

“그래. 나도 체력 떨어져서 그렇게는 못해. 어떻게든 저녁 먹기 전까지는 끝내는 걸로 해보자.”     



그렇게 크리틱 준비가 끝나고 각 학생이 발표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