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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 Feb 06. 2024

엄마 해외파견 다녀올게 1

세 살 아이를 두고 해외파견 간 엄마 이야기

1. 엄마, 나, 아빠 세 개


정확히 일 년 전 오늘, 나 혼자 캄보디아에 왔다.


새벽부터 일어나 정리하지 못하고 쌓여 있는 짐들을 부랴부랴 싸고, 아이와 마지막 점심을 먹었다. 집 근처의 순대국밥집에서 여느 때처럼 고기와 순대를 잘라 주고, 밥과 국물을 떠서 아이의 입에 넣어주면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아이에게 "엄마 일하러 가면 할머니 하고 아빠하고 씩씩하게 기다리고 있어~"하니 "응, 알았어!" 하고 활기차게 대답한다. 만 세 살을 갓 넘긴 아이를 두고 출근도, 출장도 아닌 해외파견이라니!


공항버스를 타러 가면서 빠이빠이 손을 흔드는 동안에도 생각했다.


'이게 맞는 것일까?'


처음 시작은 희망적이었다. 남편이 함께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덜컥 캄보디아 파견직 제의를 받아들였다. 단체에 서류를 제출하고, 가족 파견으로 잘 협의했다. 어떻게 짐을 싸고 준비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남편이 함께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운영하고 있던 가게를 정리하려고 했지만, 막상 예상했던 것보다 손해가 너무 컸던 것이다. 그때부터 머리와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못 간다고 말할까, 간다면 남편이 언제쯤 정리하고 올 수 있을까, 몇 달이라도 떨어져 지내는 동안 아이는 괜찮을까. 아니면 그냥 내가 데려갈까?


파견기간은 3년 반. 우선 1년 정도 후에는 최대한 남편이 잘 정리하고 올 것을 믿고 혼자 가보기로 했다. 여름에는 한국으로 휴가를 가고, 가을쯤에는 아이가 잠시라도 캄보디아에 와 있기로 했다. 남편은 하고 싶었던 일을 좋은 조건으로 하게 되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입장이었다. 아이를 낳고 잠시 경력단절 기간도 있었고, 몇 번 시도했던 취업에도 실패해서 마음이 상해있는 것을 남편은 잘 알았다. 분명 고마운 마음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싸움도 있었다.


혼자 해외파견을 가게 된 상황에서 내가 걱정한 유일한 것은 아이와 내가 헤어져 지내야한다는 사실이었다.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것도, 외국생활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엄마가 오랫동안 오지 않는 것을 점점 눈치채게 되면,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할까? 매일 어린이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가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아이는 어떤 기분이 들까? 그런 생각을 하면 마치 내가 버려진 것처럼 울컥했다.


내 걱정에 비해 남편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이제 막 세돌을 넘긴 아이가 갑자기 엄마와 헤어져 지내야 하는데, 아이가 겪게 될 불안감과 정서적 충격은 안중에도 없는 듯 태평하기만했다. 엄마 없어도 잘 있을 거니까 걱정 말라는 거다. 그런 태도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괜찮으려나 싶었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아이사랑' 홈페이지에 상담게시판이 있길래 장문의 글을 써서 문의를 하기까지 했다. 질문을 요약하자면 '엄마와 헤어져 지낼 아이의 정서적 충격을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였다. 상담사는 36개월이 지났다면 안정애착이 잘 형성되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이가 불안하지 않게 미리 상황을 설명해 주라고 조언했다. 안 그래도 아이에게 미리 얘기를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해주면 알아들을 나이인가,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 후 답변을 보고 틈 날 때마다 아이에게 이야기해 줬다.


"엄마가 일하러 비행기 타고 멀리 갈 거야. 그런데 좀 오래 기다려야 돼서 그동안 할머니랑 아빠랑 지내야 해."

"매일매일 전화해서 같이 얘기하자, 알았지?"

"씩씩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엄마가 다시 우리 딸 보러 올 거야."


그때마다 아이는 "응!"하고 잘도 대답했다. 아직은 아이가 어떤 감정인지 아리송했다.


한 동네에 사는 친정 엄마도, 남편도 내가 일하러 간 동안 아이를 돌보겠다고 자처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온 식구들이 발 벗고 도왔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었다.


그즈음 남편이 종종 늦게까지 가게일을 하느라 아이랑 둘이 잠자리에 드는 날들이 잦았다. 아이는 잘 펴지지 않는 짧은 손가락들을 이리저리 굽혔다 폈다 하다가 손가락 세 개를 겨우 펴 들고 말하곤 했다.


"엄마, 나, 아빠 세 개가 같이 있는 게 좋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쪽이 쿵 하고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면접을 보고 계약서를 쓰고 점점 일이 진행될수록 떨어져 나간 마음들이 조각조각 부유하며 심장을 찔러댔다. 종종 그때 그냥 못 간다고 말했어야 했던 것 아닐까, 자책하곤 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차마 못 간다고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루하루 이별의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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