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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Feb 16. 2024

처음부터 엄마가 아니었다




명절에 친정 식구들이 모이면 으레 지나간 옛 추억이 간식거리처럼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그 시간만큼은 올망졸망 했던 그 때의 동심으로 되돌아 간다. 이젠 나이가 많이 들어 거동이 불편하거나 몸이 아픈 형제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빠지다 보니 그 분위기도 차츰 퇴색되어 가는 것 같다. 

장거리 이동과 시댁에서 1박 2일 막노동(?)을 마치고 가면 언제나 달려 나와 한결같이 맞아주던 친정 엄마의 빈자리는,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났어도 처음 맞는 명절처럼 어색하고 허전하다. 올해도 언니와 나는 이런저런 일화를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친정 엄마 이야기로 점을 찍고 있었다.  








친정 엄마는 척추 협착증으로 1년간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 처음에는 앉아서라도 움직일 수 있었는데 차츰 심해지면서 누워 있어야만 했다. 워낙 몸이 재고 부지런해서 잠시도 느긋하게 앉아 있지 않았는데, 갑자기 꼼짝없이 누워있는 것이 엄마에게는 크나큰 형벌이었을 것이다.

그런 생활이 이어지면서 엄마는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누워서라도 자식들에게 전화를 하곤 했는데 그도 저도 귀찮아졌는지 가만히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심심하면 TV라도 봐, 아니면 노래 틀어줄까?
"아니, 다 귀찮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노래를 선곡해서 카세트와 테이프를 머리맡에 놓아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루, 그 긴 시간 동안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며 보냈을지 지금도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주말에 한 번씩 들를 때마다 엄마의 몸은 점점 더 작아지고 눈의 생기도 잃어 갔다.


"엄마~~~~"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방 한쪽을 빤히 쳐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라고? 엄마가 어디 있는데? 누구 엄마?"
"저기 거울 앞에. 우리 엄마"








그때 당시 엄마는 가끔 헛것을 보곤 했다. 새벽에도 수십 년 전에 돌아가신 큰 엄마가 가자고 한다며 걷지도 못하는 다리를 끌고 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내려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마침 잠 귀가 밝은 언니가 놀래서 뛰쳐나가 붙잡았지만, 낮에도 엄마는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할머니가 왔다고 했다. 

엄마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뭔지 모를 배신감과 상실감이 훅 들어왔다. 전혀 상상해 보지 않은 상황이라 당혹스러웠다. 엄마는 내가 태어난 그때부터 나의 엄마였는데, 나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다른 누군가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마치 내 엄마이기를 내동댕이치고 도망가려는 것 같았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환영이 보인다는 얘기를 더러 들은 적이 있어 알고는 있었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때로는 같이 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도 한 때는 누군가에게 나 같은 딸이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엄마가 아니었다는 것을......, 엄마도 나처럼 엄마가 그립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어쩌면 엄마와 이별을 해야 하는데, 기억에도 없는 외할머니는 이제 딸을 만나서 좋겠다며 짧은 순간이나마 보이지도 않는 외할머니를 질투하고 부러워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엄마는 외할머니를 따라갔는지, 큰 엄마와 같이 갔는지 알 수 없지만 50이 넘도록 소갈머리 없는 딸을 버려두고 햇살 고운 어느 날 잠시 바람 쐬러 가는 사람처럼 아무 것도 챙기지 않고 훌쩍 떠나갔다. 


엄마의 엄마를 만나 행복한 지 꿈에서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 야속하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서운함이 도깨비풀처럼 더덕더덕 묻어났다. 누가 풀어줄 수도, 대신해 줄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한 개, 두 개 도깨비풀 가시를 떼어낸다. 


이런저런 마음의 일렁임도 나 혼자 정리하고 겪어내야 할 삶의 과제인 것 같다. 어른이 되면 더 들 철도 없을 줄 알았는데 반백 년을 넘긴 지 10년이 더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더 채워야 할 소갈머리가 남았으니 그 속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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