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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Mar 27. 2024

도화지에서 적응을 배운다




어반 스케치는 필요에 따라 다양한 사이즈의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 주로 길거리나 이동 중에 그리다 보니 손바닥만 한 것부터 시작해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크기가 천차만별이다. 여행할 때가 아니면 나는 주로 A4 용지 크기를 사용했다. 

처음 어반 스케치를 시작했을 때는 그것도 어떻게 메꾸나 싶더니 차츰 그 사이즈에 적응이 되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 kellysikkema, 출처 Unsplash




그러다 수채화를 배우면서 그 두 배의 크기에 그림을 그렸다. 배로 커진 종이가 참으로 아뜩했다. 갑자기 커진 형체와 칠해도 칠해도 여전히 남아 있는 메워야 할 공간은 이삿짐을 모두 들어낸 빈 집처럼 휑하게 느껴졌다.

과연 이 빈 곳을 잘 메꿀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잘 그리고 말고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다 채울 수 있을지 급급했다. 물과 섞이는 물감은 기다려 주지 않는 야속한 인생처럼 예상하지 못한 방향과 형태로 순식간에 번져갔다. 이 낯선 상황과 씨름하는 것도 버거운데, 배로 커진 도화지는 주춤거리며 두렵게 했다. 





© s1n, 출처 Unsplash





그 난감함은 뛰어도 뛰어도 아직 하프 라인도 돌지 못한 마라토너 같았다. 괜히 시작했다는 후회, 할 수 있을까? 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불신, 잔뜩 사들여 놓은 재료의 압박...... 온갖 잡다한 생각으로 들어찬 머리를 싸매고 빈 집 같은 넓은 종이를 붙들고 앉아 시간만 나면 그려댔다. 

창작을 위한 고통! 이런 것은 내가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밤이고 낮이고 닥치는 대로 그리고 또 그렸다. 그래서 그려댔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아 찢어버린 종이가 숱하고,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용을 쓴 적도 숱하다. 





© nate_dumlao, 출처 Unsplash





그래서였을까? 어느 날 갑자기 텅 빈 집 같던 넓은 종이가 친숙해졌다. 스케치를 하고 색을 입히는 것이 두렵지 않아 졌다. 그 집이 좁다는 생각도 들었다. 좀 더 큰 것을 도전해 볼 만하겠다는 자신감도 가불로 슬그머니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문득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그러기까지 안간힘을 쓰며 쏟아부은 적응 끝에 피운 꽃이 "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도화지와 부대끼면서 적응을 배우고 익힌 것 같다. 종이 한 장도 호락호락하지 않고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넓은 종이를 채우는 동안 그 안에 나를 입히고 담았다는 생각에 오늘은 나에게 꼭 이 한 마디를 해주고 싶다.

"그래, 참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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