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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Mar 29. 2024

물 한 종지의 무게




어제저녁 수영을 하다가 귀에 탈이 난 것 같아 오후에 병원을 가려고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전신주 아래에 얌전히 놓인 물 한 종지가 눈에 띄었다. 쏟아버리면 금세 흔적도 없이 땅 속으로 스며들것 같은 아주 작은 양이다. 그 옆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물 종지만 한 작은 돌멩이가 놓여 있다. 아마도 물그릇이 넘어지지 말라고 받쳐 놓은 것 같다. 마치 도란도란 동갑내기 친구처럼 서로가 어깨를 기대고 있다. 

오다가다 지나는 길고양이들 마시라고 누군가 놓아두었을 것이다. 그 마음도 그 옆에 같이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유독 그 자리의 햇빛이 밝다. 팔자에도 없는 집사가 되지 않았으면 절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풍경이다. 









얼떨결에 길고양이 새끼에게 간택이 되어 집사가 된 지 8년 차가 되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이젠 제법 서로가 보내는 신호를 알아듣는다.

때가 되면 밥 달라고 아침마다 깨우고, 추우면 이불을 헤집고 들어와 팔베개를 하는 녀석, 제일 좋아하는 츄르 소리에 짧은 귀를 토끼처럼 치켜세우고, 제 이름을 부르면 한 번도 모른 척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사람이 오면 반가워할 줄 알고, 사람이 나가면 아쉬워한다. 싫어하는 목욕은 안 하려고 죽어라 도망치고, 손톱 깎는 건 이제 포기하고 받아들였는지 딱 손, 발톱 열 개 깎을 때까지만 얌전하게 참아준다. 주먹만 한 머릿속에 생각이란 게 있을까 싶은데 녀석은 분명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도 물 종지는 든든히 곁을 지켜주는 돌멩이와 함께 잘 버티고 있었다. 세차게 부는 바람에도 쏟아지지 않고 물은 그저 일렁이고만 있었다. 더 먹어야 할 길고양이들을 향한 숨죽인 아우성처럼....... 

어쩌면 가볍게 스치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그 찰나의 인연이 벌써 8년의 세월을 품었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도 대화로 교감하며 정이 쌓여가고 있다. 사소했던 그 시작이 알고 보니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킨 거대한 파도였다. 








내게는 가치 없고 사소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목숨 줄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길고양이를 위한 작은 물 종지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 내가 섣불리 가치가 있다, 없다 판단하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정 반대의 가치로 매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걷어찬 하찮은 그것도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의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전신주 옆에 놓인 물 한 종지의 의미로 보자면, 과연 가치가 있는 것과 하찮은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 나에게 되물어 본다. 가치의 무게와 의미를 몸을 숙여 낮게 돌아 볼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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