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 해밀 Sep 29. 2024

가벼워질 때까지......




이곳으로 이사하고 나서는 가까운 거리를 나갈 때도 반드시 내비게이션을 이용해야 했다. 내비를 사용하면서도 길이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낯선 길에서는 절대적으로 네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초반에는 길을 익힌다기보다 그저 시키는 대로 가는 것에 급급했다.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수영장이 있어서 오후에 가방을 챙겨 나섰다.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으로선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커다란 즐거움이다. 장소가 다르고, 시스템이 다르다 보니 첫날에는 일일 매표 하는 것부터 물어보아야 했다.





출처 pinterest




낯선 곳에서는 멀쩡한 사람도 쪼그라들게 만든다. 그래도 모르는 게 있으면 씩씩하게 물어보고 최대한 빨리 익히려고 했다. 익숙하지 않은 곳의 수영장에 떠 있는 것도 왠지 어색했다. 배영으로 물을 가르고 나가면서 천장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었다. 나를 기억해 달라는 부탁인지, 내가 기억하겠다는 의지인지 모르지만 어딘가에 내 마음을 부비려는 몸짓이었을 것이다.

한 번보다 두 번, 두 번보다는 세 번쯤 갔을 때 처음의 긴장이나 어색함은 많이 사라졌다. 어느덧 이곳에서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조금씩 주변이 보이는 것처럼 일상의 작은 루틴이 생겼다.




출처 pinterest




그러나 이따금 차를 몰고 오갈 때마다 한 시간이나 더 달려가야 도착하는 부산을 표시하는 이정표가 눈에 띄면 애써 보려 하지 않는다. 아직 "부산"이라는 단어가 설핏 아프다. 내가 선택한 삶이고, 내가 원한 길임에도 내가 그곳을 떠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뺏어간 것 같은 상실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수영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기를 내어 내비를 켜지 않고 왔다. 그동안 군데군데 눈으로 찜해 놓은 빠져나가는 길을 기억하며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이 작은 등짐 하나를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하다. 내비에서 벗어난 것처럼 언젠가는 나를 끌어당기는 묵은 그리움에서 자유로워질 날이 오지 않을까?

오늘, 내 삶에서 더 이상 내비게이션이 필요 없는 구간을 지우개로 지웠다. 더 많이 지울수록 나도 더 가벼워지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돌멩이를 치우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