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간간히 오니, 덥지 않게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겠다 싶어, 어제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를 끊었다. 그리고 불과 하루 전에, 딸 담임 선생님께 체험학습 신청서를 제출하는, 민폐 학부모가 되었다.
아침 일찍 제주공항에 도착하고, 성산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배가 고파 잠시 세화에 내려 '서울'국수가게라는 곳에 들어가 '국수'와 전혀 상관없는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이때부터였을까? 여행이 의도치 않게 흘러갈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던 게.
도착하고 지금까지 제주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연무인지 안개인지 모를 하얀 그것들이 이곳 제주 동부를 덮고 있다.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는 알오름에 올라서도, 광치기 해변 바로 옆을 지나는 201번 버스에 앉아서도 바다를 전혀 볼 수 없었다. 이곳은 마치 영화 <헤어질 결심>에 나오는 도시 '이포' 와도 같아 보인다.
보고 싶었던 제주 바다는 꼭꼭 숨었지만, 대신 종달리 마을 가는 길에서 새소리들을 만났다. 잘 보이지 않는 만큼 오롯이 소리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종달리' 마을의 '종달'은 종달새의 '종달'은 아닐터인데, 이렇게도 이곳에 새가 많았다니.
함민복 시인의 <그늘학습>은 틀렸다. 부딪혔다. 분명 부딪혔다. 새소리들이 서로 부딪혔다. 강화도의 새들과 제주도의 새들이 말하는 법이 서로 다르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평화롭고싶은 시인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던 것일까?
연무인지, 안개인지 모르는 그것들이 더 진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네이버지도를 보고 걸어왔는데, 진흙밭이 나타났다. 장마가 이곳을 뻘밭으로 만들었나 보다. 딸의 크록스 샌들이 벗겨지고 복숭아뼈 한참 위까지 올린 내 청바지에 진흙이 묻었다. 이젠 슬슬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그렇게 걷다가, 드디어 책방이 보였다.
몇 년 전에 왔던, 이곳 종달리 소금밭의 '소심한책방'은 더 이상 '소심한' 곳은 아니었다. 두세 평 남짓 되던 공간은 이제 그 열 배나 된 듯하다. 그럼에도 주인장은 여전하시다. 그때도 쉼 없이 드나드는 손님들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에 빠져 계셨는데, 지금도 무언가에 집중하고 계신다. 그 일이 책방 일과는 상관없어 보여, 좋았다. 그사이 나는, 여행지까지 와서 책까지 사기에는 돈이 아깝다 생각했던 사람에서, 이젠 여행지에 오면 기꺼이 동네서점을 찾고, 그곳에서 반드시 책을 사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책방을 둘러본 딸이 바로 책을 집어든다. 학교 도서위원회 친구들이 추천한 책이라며, <우리 반 애들 모두가 망했으면 좋겠어>를 구입했다. 테이블에 앉아 읽기 시작한 딸 주변을 맴돌며, 나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책을 찾아 나섰다. 요즘 핫한 유시민 작가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에 잠시 마음이 기울었지만, 결국 내가 고른 책은 어맨다 고먼의 <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라는 시집. 이 책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와 메리 올리버 시집 사이에 꽂혀 있었다. 아마도 짐작건대, 주인장은 이 '어맨다 고먼'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와 '메리 올리버'와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시인으로 생각하나 보다. 책을 펴서 몇 편의 시들을 훑어보고 알았다. 그래. 주인장이 옳았다.
오랜만의 차오름.
이번 제주 여행에서 아직 바다는 못 봤지만, 나는 대신에 청년 시인 '어맨다 고먼'을 만나게 되었다. 넘실거리고 있을 파도와 같이, 내 마음이 흔들거리며 춤을 췄다.
매일 우리는 배우고 있다
어맨다 고먼
매일 우리는 배우고 있다
편안함이 아니라 본질과 더불어 사는 법을.
미워하지 않고 서둘러 나아가는 법을.
우리를 넘어서는 이 고통을
우리 뒤에 두는 법을.
기술이나 예술처럼,
실천하지 않고 우리가 희망을 지닐 수는 없다.
그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예다.
* 이 글의 제목 <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 은 어맨다 고먼의 첫 시집 제목을 인용했습니다.
* 소심한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