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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ak KIM Nov 25. 2021

투박한 건물 속 강렬한 메시지, 오방 최흥종 기념관

'풍장터' 양림동에서 한 사내의 믿음이 자라나다

'괴로움', '근심'이란 뜻의 아골은 여호수아서에서 범죄자 아간이 아골 골짜기에서 처형되는 곳으로 등장한다. ¹ 더 나아가서 에스겔서에 뼈가 가득할 정도로 황폐한 곳으로 나오는데 ², 그만큼 성경에서는 아골 골짜기가 절망과 죽음만이 가득한 곳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과거에는 전염병 걸린 시체를 치우는 풍장터라 불리며 아골 골짜기나 다름없었던 양림동, 그러나 유진벨, 오웬, 우월순과 같은 미국의 선교사들이 들어옴으로써 뒤바뀌기 시작한다.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세움으로써 일대를 '서양촌'으로 변모시켰고,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아골 골짜기 같았던 '풍장터' 양림동을 소망의 땅으로 ³ 변화시켰다.

특히 양림동에 자리 잡고 있었던 유진벨 선교사는 광주에서 이름 날린 어느 건달의 인생을 뿌리째 뒤바꿔버린다. 그가 바로 뒷날 광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방(五放) 최흥종 선생이다.

방황하던 인생에 변화가 일어나다

'싸움꾼 최망치', '주먹', 이것은 최흥종이 기독교를 접하기 전까지 그를 따라다녔던 별명이었다. 그는 부모를 여의고 방황하였으나 유진벨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그의 첫 예배에 참석하여 삶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의료 선교사인 포사이드를 만나는데, 그와 길을 가는 도중 한 나환자를 만난 포사이드는 거리낌 없이 그 나환자를 도와준다. 이를 본 최흥종은 자신의 인생을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1912년 봉선리 땅 1000평을 기증하여 훗날 애양원이 되는 광주 나병원을 설립했고, 계유 구락부를 결성하여 빈민구제 사업을 전개했다. 또한 해방 후에도 나환자뿐만 아니라 결핵 환자들을 위해 헌신해왔다.

나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다

최흥종 목사는 한센병 환자를 비롯한 소외된 이들을 도우며 산 것은 물론,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도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것은 물론, 광주 YMCA와 신간회 광주지회를 창립하여 계몽과 여성교육, 민족운동에 힘써왔다. 또한 일제의 경양방죽 매립에 대해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1944년에는 전남대 의대의 전신인 광주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는데 기여함으로써 미래 인재 양성에 큰 도움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복음을 등한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유진벨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접한 사람답게 그는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목회자로 거듭난다. 북문안교회에서 장로가 된 그는 1921년 북문밖교회를 설립하고, 이후 금정교회와 모슬포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한다. 또한 시베리아에서 2차례에 걸쳐 선교활동을 전개한다. 이렇듯 그는 사회운동과 빈민구제를 전개하면서 복음 전파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화로운 빛으로 참된 자유를 누리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침략의 야욕을 드러냄과 동시에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1935년 우리 교회는 신사 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마는데, 이에 최흥종 목사는 반발했다. 그는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교회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함과 동시에,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자 자신의 호를 '오방(五放)'으로 정하여 세속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참된 자유를 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세속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그는 해방 이후에도 건국운동에 참여했으나 직책을 오래 수행하지 않고,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데 열중했다. 그것도 그가 1966년에 서거할 때까지 말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백범 김구 선생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휘호를 그에게 써준다.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과 같이 한다는 뜻을 지닌 휘호를 통해 오방이 세속을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려왔음을 잘 보여준다.

최흥종 목사의 낮은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건물

오방 최흥종 기념관은 유진벨 목사 기념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커튼월 형태의 입구와 다르게 겉은 붉은 벽돌로 장식하여 투박해 보인다. 더욱이 유진벨 기념관보다도 더 아래쪽으로 내려와 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오방 선생은 신사 참배를 거부할 당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사망통지서를 발송했고, 자신을 우뚝 세우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서 이 기념관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가 유진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던 점을 고려하여 유진벨 기념관 앞을 잔디 마당으로 조성해 많은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도록 다.

오방 최흥종 기념관을 다녀가며

오방 최흥종 목사는 낮은 자세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며 식민지배로 피폐해진 우리 사회에 힘을 실어 넣은 분이었다. 허나 해방 후 양적 성장과 기복신앙을 주로 삼은 우리 기독교가 그를 따라 행하고,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임이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양림동에 조그맣게나마 오방 목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에 대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최근 코로나 19 상황 속에서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안위와 만족만을 생각하다가 끝내는 집단감염의 온상이 되어 버린 이 나라의 기독교를 다시금 떠올린다. 지금의 기독교는 하나님과 이웃, 자신에 대한 사랑이 부재한 것 같다. 오방 목사의 일대기를 통해 회개하고 성찰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거듭나는 한국의 기독교가 되길 바랄 뿐이다.


1) 여호수아서 7장 25~26절

2) 에스겔서 37장 1절

3) 호세아서 2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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