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에 관한 노래와 영화 작업기
영화관을 좋아하십니까?
영화관에 좀처럼 가지 못하게 된 지금에서야 우리는 왜 영화관을 가는지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비단 저에게만 해당되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제 사랑에 닿는 공간에는 공통적으로 영화관이 있었습니다.
입장할 때의 설렘과 푹신하고 어두운 색의 의자, 입학날 신입생처럼 기웃기웃 어리바리를 떠는 사람들.
사랑하는 감독과 배우와 그들이 그려낸 장면들 속을 두 시간 정도 되는 내 인생을 바쳐 감상하는 것.
이런 것들이 제가 영화관을 사랑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가을에 새로 들려드릴 이 노래는 그 영화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노래를 쓸 때면 항상 저는 시를 쓰는 마음으로 적어 내려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소설을 만드는 마음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카지이 모토지로의 유명한 소설 ‘레몬’에서의 그 어떤 자전적인 요소와 망상을 다루는 것을 보고 나의 망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 나열을 해보곤 그 망상을 노래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돋았습니다.
가사를 먼저 보여드릴게요
영화관에서
오랜만에 들어선
극장에 앉아서
늘어지는 광고와
종이표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두리번대 봤는데
두열 앞 이상한 실루엣에
숨이 멎었다가 다시 정신 차리니
영사기는 당신의 뒷덜미에
내 모습을 쏘고 나는 까무러치고
진짜는 아닐 거라 확신하지만
두 시간 내내 식은땀은 모조리 내 눈에
굴절되던 당신의 얼굴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럴까 난 많은 게 아깝네
진정을 해야겠지
객석도 꽤 찼는데
손으로 입을 막고서
마지막 장면을 집중하는 사람같이
그 사람도 자신도
아닌 당신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영화는 끝나 불이 켜지니
하나둘씩 일어나 퇴장하네
스크린 앞을 멋지게 지나는 이들은
배우는 아닐 거라 생각되지만
완벽한 순간을 담으려는 한 감독처럼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나
액션 후 제때 컷을 해야 하는데
왜 이럴까 난
많은 게 아깝네
이 노래의 등장인물은 오랜만에 영화관에 입장해 좌석에 앉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모두 굳이 20분 먼저 들어가 그 영화와는 상관없는 광고를 다 이겨내야 합니다.
그도 마찬가지. 하품이 나오고 사그락사그락 팝콘을 뒤지거나 호로록 벌써 다 마셔버린 빈 콜라만 괴롭히기 다반사입니다.
그 와중에 그는 두 열 앞에 어떤 사람의 뒷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숨이 멎었다가 정신을 차립니다.
필히 그이일 것이 틀림없다 라는 마음속에서 영화는 급작스레 시작되고
그 사람의 뒷덜미에서 그는 그가 출연을 했던 영화를 두 시간 내리 보아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조용한 우왕좌왕 속에서 이미 영화는 끝나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관객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망연자실함 속에서 본인은 많은 게 아깝다는 한마디밖에 하지 못하죠.
마지막 가사를 뱉고 정신 차리지 못하는 그에게 후주가 따귀를 날리며 곡은 끝이 납니다.
생에 이런 경험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미 곡을 써놓았으니 따로 말을 붙이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망상을 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망상의 장르 중에서도 남에게 하는 넘겨짚기와 본인에게 하는 자기 합리화 등이 있는데
저에게 있어서는 항상 어떤 이유가 필요합니다. 당위가 필요합니다.
저는 구실과 명분이 참 중요한 사람 같아요.
그 실체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이미 망상 덩어리라는 말입니다.
이 노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또 어떤 다짐이 필요했는데(자기합리화)
이 노래를 만들자마자 동그랗게의 프로듀서인 민석에게 꼭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민석은 이 노래를 너무 예뻐해 주었고
저는 이내 곧 민석의 집인 제주에 가서 이 노래를 완성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뭔가 익숙하죠?
고교 수학여행 이후에 처음 가게 된 제주에서 많은 걸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견고한 망상을 위해 ‘작업’이라는 벽돌을 주변에 쌓아놓았기도 했으니까요.
영험하고 신비하다는 삼봉산 주변에 위치한 민석의 집에서 이틀 내리 술을 먹으며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음원을 위한 본 녹음이나 공연 전에는 술을 먹지 않는데
이게 제주인지라 별 수 없이 몸을 그에 절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노래에 대한 애정이 넘쳐흘렀던 둘이었기 때문에 그게 과한지도 모르고 모든 것을 담뿍 담았습니다.
사진작가이신 민석의 아버지의 조명 장비를 마이크 스탠드 삼아 제가 가져간 마이크를 걸고, 서로 행복해하며 녹음을 진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잠이 없는 까닭에 일찍 일어났던 아침에는 홀로 산책을,
낮에는 배 터지게 맛난 걸 입 안에 넣어댔고
새벽까지 틈틈이 나와 닮은 얘기들을 멀리 서울에서 받고 제주에서 자랑을 보내며 오롯이 모든 하루의 하루를 있는 그대로 즐겼던 것 같습니다.
그 무엇보다 첫밤에 인사했던 난생처음의 반딧불이와 우연히 차를 타고 이동하다 잠시 멈춰 마주친 돌고래가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 밤에는 너무 감사한 마음에 민석의 부모님 앞에서 유재하와 김현식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가 기타를 들자 자연스레 민석이 피아노에 앉아 민석의 집은 어느샌가 공연장이 되었어요.
부모님께서 많이 기뻐해 주셔서 저 또한 많이 기뻤던 밤이었습니다.
감정이 과한 제주에서의 보컬을 서울에서 다시 녹음해야 했지만
후반부에 피아노 솔로와 더불어 보컬과 사운드적인 가공을 통해
훨씬 더 멋진 연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바닥에서 만족하면 끝이라는 말을 자주 접했던 것 같은데
저와 민석은 우리가 만들어낸 무언가가 참 예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사실 제가 쓴 모든 노래 통틀어 이 곡이 저는 제일 좋습니다.
이제 노래가 다 완성이 되었고
작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Studio MOS의 대표님과 모델 김닿아님과 함께 머리를 맞대며 제 머릿속의 이야기를 부풀려내었습니다.
1막에서 남자는 새벽까지 작업을 합니다.
그 늦은 시간에 불편한 옷차림으로 그를 찾아온 여자는 그에게 관심을 요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좀처럼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리저리 그의 주변을 배회하기를 여럿 반복합니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와 슥슥 발소리, 허공을 휘휘 젓는 손소리만 가득하고.
2막에서 일을 마친 남자는 방으로 돌아가 영화를 보게 됩니다. 뒤따라 들어온 여자는 그의 옆에 앉아 술과 주전부리를 차례차례 꺼내어 그에게 권합니다만 여전히 남자는 그 모든 걸 인지하지 못합니다.
옷과 짐을 흩뿌려놨던 여자는 영화가 끝나자 노트북을 닫습니다.
남자의 영화는 곧 여자였습니다.
영화 밖, 현실의 남자에게는 초라함과 초라한 푸른 새벽만 남았습니다.
회고인지 상상인지 모를 장면 속에서 아파하기도 기뻐하기도 하며 이야기는 끝나게 됩니다.
영화라는 매체를 반평생 사랑해온 저에게는 너무나도 행복했던 작업이었습니다.
노래의 시작부터 영화의 끝까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어 참으로 복되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9PLz-Bm7cPs&t=40s
정말로 올해는 제 스물 이후 가장 좋은 해인 것 같습니다.
저는 여름밤을 제외한 여름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런 여름이 좋아질 정도로 저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무료와 평온 속에서
망상 안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언젠가 언젠가 우리 모두 영화관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기를 바라며 민석이 이 곡을 올리며 쓴 글을 덧붙입니다.
가을이 가기 전에 다른 노래와 이야기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몸 마음 건강히 지내셔요.
재회가 미련을 낳는다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다.
우리는 재회보다 미련에 더 집착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미련들에 이름을 붙이려고 한다.
마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와 백목련이 결부되고 설화(說化)되는 것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남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내가 더 편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