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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이라고 불립니다 Jan 27. 2024

독일에서 사는 일상의 '하루'

오늘은 일기

해는 떴겠지만, 환한 햇살이라고는 한줄기도 들어오지 않는 늦은 아침에 눈을 떴다.

한국이라면 오늘날이 흐리려나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흐린 날의 하루겠지만

그냥 겨울의 아침이다. 지극히 평범한 하루의 아침.

햇살에 눈부셔서 잠이 깬 날이 있었던가? 아마도 여름날의 한동안? 은 그랬을 수도 있다.

병원 예약이 있어서 일어마자마자 외출준비를 했다. 딱히 외출준비할 거라고는 없다.

그저 머리 감기. 비비크림 바르는 정도. 걸려있는 니트와 바지를 무심하게 입고,

머리를 감았으니 털모자는 쓰지 말자고 생각을 한다.

환기를 하려 창문을 열어보니 날씨가 별로 안 추운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더 안 추웠다.

핸드폰에 뜬 날씨를 보니, 영상 12도다.

지난주 이 즈음이 -11도였다. 일주일 만에 20도를 오가는 날씨... 심히 독일답다.


병원은 사람들이 많았다. 전화로 예약할 때 공지받은 게 '대기시간이 있는 예약시간'이었기에, 기다릴 시간에 할 일을 생각해 왔다. 장보기 목록정리.  REWE와 EDEKA 앱을 열어 이번주 할인품목들을 훑었다.

이번주는 고기 세일이 별로 없다. 독일도 꽤 물가가 올라서 저렴하던 고깃값이 3분의 1 정도 올랐다.

그나마 할인을 하면 예전 가격이 된다. 그래서  할인상품 위주로 장보기 목록을 작성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나온 김에 평소에 고기가 비교적 저렴한 쇼핑센터 안에 있는 슈퍼를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내 이름이 불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다 없어졌다.

예약을 해도 1시간을 기다릴 때도 많다. 그래서 대기시간에 대해 각오를 했는데, 그래도 오늘은 55분 만에 이름이 불렸다.

병원의 대기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큰아이가 세살무렵이었나? 소아과에 갔을 때다.

우리 아이들의 소아과는 지금은 아버지의 병원을 물려받은 젊은 의사가 서너 명의 의사를 고용해 제법 큰 병원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 아버지 의사와 여의사 이렇게 둘이서 진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든 그렇겠지만 겨울의 소아과는 예상치 못한 아이들의 감기로 늘 붐빈다.

예약을 했는데도 제시간에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그리고 30분 1시간... 1시간 반이 넘었는데도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아이를 맡길 데가 없으니 한 아이가 아프면 다른 아이도 데리고 가야 하는데, 잠이 깬 둘째는 유모차에 앉아 찡찡거리기 시작했다. 언제 우리 차례냐고 두어 번 물었는데도 좀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1시간 반이 넘어가자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눈물이 났다. 괜스레 멈추지 않는 눈물을 겨우 닦고 있을 때 이름이 불렸다. 2시간이 조금 못 되었을 때다. 예약이 있었는데도 2시간 가까이 기다린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급기야 우리 담당의던 여의사 앞에 앉았을 때 내 눈은 붉게 퉁퉁 부어있었다. 의사가 눈치채고 물었다. 나는 예약을 했는데도 2시간을 기다렸다고,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아마도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런가 보다고,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사실 그즈음 힘들 때는 늘  타향살이니까...로 귀결되곤 했긴 하다. 그런 결핍의 이유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던 때였다.

뜬금없이 나온 나의 말은 파장이 컸다.

지금도 그렇지만 독일은 '인종차별'이란 것은 거의 금기시되는 말이다.

아마도 히틀러시대의 영향인 듯 하지만 학교에서도 우리는 '인종차별 없는 학교'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피력할 정도니.

그런데 내가 병원에서 내가 인종 때문에 차별받는 것 같다고 했으니... 의사는 깜짝 놀라서, 역시 더 깜짝 놀라 하얗게 질린 얼굴의 간호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고 간호사는 응급이 많아서 순서가 밀렸다고 했다.

그래도 예약을 했는데 그렇게 기다리게 하면 되냐고 주의를 줬고, 나에게는 친절하게 상황설명을 하고 다음부터는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그 후로, 정말 그런 일이 더 이상 없었다. 소아과를 가면 나를 보는 간호사들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예약을 하고 갈 때는 그다지 많이 기다리지 않았고, 혹시나 예약이 없이 응급으로 갈 때면 오래 기다린다고 미리 알려주었다. 요주의 인물이 된 거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빠른 대기시간으로 인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병원에서 나오니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세워놓은 자전거가 몇 대 쓰러져 있었다.

비바람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가까운 쇼핑센터로 가는 동네기차를 타러 바로 앞 역으로 가는 길, 다행이라고 내뱉던 말이 무색하게 비가 왔다. 몇몇 사람들은 비를 피할 만한 처마가 있는 상가 아래에 서있고,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그냥 걸었다. 곧 비바람이 불었다. 이 상황에서도 뛰는 사람은 나뿐이다.

역에 도착해서 기차 시간표를 보았다.

5분 정도 기다리면 쇼핑센터로 가는 기차가 온다.

주변 도시들을 오가는 기차가 우리 집 근처 역을 지나간다. 주변 도시에서 학교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등학교시간에는 기차편수가 많다. 중앙역인 쇼핑센터까지는 5분이 걸린다. 버스 타면 돌아 돌아 30분은 족히 걸리니, 여기서는 기차를 타는 게 맞다.

내일부터 또 기차가 파업이다. 이달만 두 번째다. 기차파업이 시작되면 며칠 동안 기차와 지하철 중 하나인 S반이 안 다닌다. 그래 오늘 다녀와야겠다. 기차 파업하기 전에...

그런데 얼마 후, 플랫폼의 전광판에서 내가 탈 기차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오는 인포메이션...

기다리던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하나둘 사라졌다.

가끔 나는 독일이 공산주의가 아닌가 생각을 한다. 이런 경우, 다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길을 찾는다.

우리나라 같으면 고성이 오갈법한 상황에서도, 그저 조용히...

24년 동안 살아도 한국 사람인 나는 아직도 기가 차고 이해를 못 해서 혼자 열받곤 한다. 그러다가도,

그나마 이제는 독일이니까... 하면서 포기. 그래 포기다. 기대라는 걸 하지 말자. 맘먹으며.

일반 버스가 다니는 뒤쪽길로 가보니  못 보던, 번호가 없는 버스가 한대 서있다.

아, 임시버스다. 그나마 철도앱에는 나오지도 않았다. 고객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이 상황에서도 버스가 있다는 것만으로 고마워하는 나... 버스에 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버스기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아, 독일에 길들여져 가는 내가 싫다.  

쇼핑센터에서 나오는 길 갑자기 하늘이 파랗고 해가 났지만, 우와~~ 하고 감탄하지 않는다.

주변에는 아까의 바바람으로 자전거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져 있었다. 그렇듯 이 밝음은 곧 사라질 것이기에.

독일사람들의 무신경함과 무심함은 날씨 탓일까? 문득, 기대할 수 없는 날씨 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그려려니하며 이해해본다.  그나마 나는 한국에 가곤 하니까, 하면서 위로를 해본다.

문득, 작은 아들이랑 한국으로 함께 여행 왔던 아들의 독일 친구들 말이 생각이 난다.

"한국은 왜 맨날 해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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