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몇 년간 남사친여사친인 친구들 몇몇이 시간이 날 때마다 여행을 다녔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여행이 일반적이지 않던때였고 스마트폰이나 여행 관련 정보도 별로 없었던 때라 우리는 그저 배낭을 둘러메고 지도를 펼쳐가며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때만 해도, 남사친여사친이라는 말도 없었고 연인끼리도 지금처럼 공식적으로 여행을 다니지도 않았던 때였는데 우리는 시간이 맞을 때마다 계곡 한가운데 텐트를 치고 유명한 해수욕장이 아닌 한적한 동해에 민박을 하고 겨울에 내장산을 올랐다. 돈이 떨어져서 할머니집에 들러 밥과 차비를 얻어서 왔고, 지하철에 떨어진 과자에 눈길이 갔다가 서로 쳐다보고 민망한 적도, 기차 입석으로 가다가 서서 침을 흘리고 잔적도, 너무 추워서 들어간 시골의 호텔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교대로 화장실에서 따뜻한 물에 손발을 녹이던...
지금 생각하면 우리 중엔 J가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 계획도 생각도 없이 그저 여행만 좋아서 다니던 시절이었다. 종종 여자 둘 남자 둘이 다녔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주변사람들은 분명히 서로 연인이거나, 서로 마음이 있어서 연인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는 커플들이었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이야기를 하며 아무 일도 없이 한방 한 텐트에서 잤다고 하면 믿지 않는 눈치들이다. 같이 간 우리끼리나 웃으며 이야기하는 추억들이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그때 가본 동해 어느 한적한 바닷가, 불영계곡, 내장산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여행보다 기억에 남는다. 인생의 첫 여행(부모님과 함께가 아닌)이었고, 친구들과의 편안한 일정(일정일 것도 없는), 남편이고 아이고 누구 신경 쓸 일도 없는 맘 편한, 말 그대로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여행은 내 인생에 참잘한 일이라고 늘 생각한다.
얼마 전 우연히 하게 된 가이드 일정 중에, 고객님(?)이 내게 물으셨다. 유럽에서 오래 살았으니 유럽에서 여행한 곳이 많겠다고.
24년을 독일에서 살았지만, 사실 다른 나라로 여행 간 건 손가락에 꼽을 정도뿐이었다.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보통 독일사람들이 휴가와 여행에 목숨을 건다 싶을 정도로 챙겨 다니는데,나는 어느 날 아들이 우리는 왜 다른 친구들처럼 방학 때 여행을 안 가느냐고 한 소리해서 그런 거야? 하면서 몇 번 다녔던 게 전부다.
그런데, 요즘 나는 독일의 전역으로 오스트리아로 영국으로... 계속 스케줄이 생기며 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 일정은 목적이 분명하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목적이 있는 여행은 또 괜찮다. 내가 보고 싶은 곳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것보다 누구와 함께하는 여행인가가 나에게는 더 중요하고,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인가가 또 더 중요하다. 가이드일을 위해 돌아다니며 좋은 장소를 찾아 제공하는 일은 즐거웠다.
누군가의 즐거운 여행을 도와드려야 하는 일은 나한테참 잘 맞는참 괜찮은 일이다.
남편이 운동유튜브를 시작했다. 우리 둘 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들을 새로이 시작한 타이밍~
독일 교통 정액권인 도이칠란트티켓으로 잘츠부르크를 갈 수 있다길래, 남편이 길게 쉬는 어느 날 유튜브 영상을 위해 아침 댓바람부터 함께 나섰다.
"여기로 가면 돼."
"그건 이쪽이야."
잘츠부르크에서 내내 내가 가는 곳을 알려주니, 남편이 "우와~ 너무 좋다. 이래서 사람들이 가이드를 의뢰하는 거구나! 진짜 편하다!"
한다.
늘, 낯선데로 가면 길눈이 밝은 남편이 길을 찾아서 다녔는데 잘츠부르크를 잘 공부해서(?) 가이드했던 경력이 있는 내가 안내를 하니 남편이 처음으로 편안하게 다녔다.
간식도 샌드위치도 물도 싸가고, 지출이라고는 한 알에 1.90인 원조 모차르트 초콜릿만 했다.
그렇게 집에 오니, 오후 4시. 이렇게 하루 만에 휭 다녀올 수 있는 곳이었다니... 유럽에 사는 이런 장점을 살려 종종 돌아다녀볼 생각이다.
물론 가이드 계획을 위한 큰 그림도 포함이어서 나는 즐거이 나선다.
남편이 휘센을 가자고 그렇게 졸랐는데 싫다고 하던 내가 휘센을 가야 한다고 하니 (디즈니성의 모티브인 성이 휘센에 있어서 한국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의아해하면서도 반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