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다로운 일본 고객의 요구에 맞춰 내다
회사가 성장하여 어느덧 업계 시장점유율 TOP5 안에 들어가면서 묘한 자신감이 커졌습니다.
특히 개발과 품질 부문은 그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판매수량도 늘어나고 그에 비하여 제품의 결격사유인 품질에 대한 이슈는 크지 않았습니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춰져 가고 있고 완벽해져 가는 듯이 보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객수도 점점 늘어나게 되었는데 그 고객 중에 우리의 품질에 대한 자존심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고객이 등장했습니다.
구매하겠다는 수량도 많은 편이고 고가의 모델도 아니어서 물량을 맞추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는 섣부른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이 고객은
제품 출하 때마다 여러 명이 파견을 와서 출하 Audit을 했습니다.
아예 큰 회의실을 차지하고 만들어 놓은 제품을 Sampling 해서 하나하나 검사를 했습니다.
하루 종일 붙어서 묻는 말에 대답해줘야 하고 Data를 요청하면 바로바로 Data를 제시해야
했습니다. Audit에 같이 참여하는 품질부서 담당자들은 피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퇴근 무렵이면 직원들의 얼굴은 마치 짜낸 종잇장처럼 창백해져 있었습니다.
Audit시에는 흰색 장갑을 끼고 제품을 조심조심 다루었고, 돋보기, 자 등 도구들도 여럿
동원하여 뚫어져라 보고,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곤 했습니다.
생산라인에서 제일 걱정했던 것은 제품을 둘러싼 비닐 표면에 묻어 있는 지문이었습니다. 지문이 발견되면
전수 선별/교체를 요청했습니다. 초반기에는 생산라인의 작업자들이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 붙여 놓은 비닐에지문이 묻어 있어도 어차피 고객이 제품을 받으면 떼어 내는 비닐이니 상관없겠지 하고 생각했고
우리 품질부서도 별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모든 제품을 그대로 출하해 오던 터였습니다.
하지만 이 고객은
"우리가 보는 순간 불쾌할 수 있는 흔적이라면, 우리의 고객도 똑같이 느낄 것입니다"
이 제품을 자신들의 고객들이 보면 기분이 상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지금 제가 생각해도 당연한 이야기로 들립니다만, 그때는 소위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제품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잘 표시도 안나는
지문하나 나왔다고 전수 선별/교체를 하라고 하다니.'
그런 선별/교체를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런 작업에 시간과 인력이 투입되다 보니
추가 생산은 더디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정작 고객이 요청한 수량을 못 맞추는 현상까지
벌어지게 되어 그 고객과의 납기 약속은 매번 차질을 빚게 되었습니다.
영업담당자들은 우리가 납기를 못 맞추게 되는 이유에 대해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아내느라
머리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자재가 늦게 공장에 입고되어 생산이 늦어졌다고 협력사 핑계를 대기도 하고, Audit시 발생한
불량수량이 빠져서 그렇다고 하기도 하고, 가벼운 품질이슈가 발생해서 조금 늦어졌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고객도 우리를 믿지 못하여 다른 경쟁사에 오더를 주게 되고 그로 인해
고객이 요청하는 우리 회사에 주는 오더수량은 안정적일 수 없고 수시로 바뀌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영업이 주기적으로 공장을 방문하여 회의를 하던 어느 날 어떻게 하면 납기를 제대로 맞출 수 있는지
이야기를 해달라는 영업팀장님의 말씀에 저는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 한 달의 출하계획을 확정해 주세요. 그러면 1주일 전에 제품을 다 만들어 제품창고에 입고를
시켜 놓겠습니다.'
영업팀장님은 고객한테 제안을 해보겠다고 선뜻 대답해 줬습니다.
고객과의 미팅 후 고객도 제가 제안한 대로 판매계획을 사전에 확정하고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말을
영업팀장님으로부터 들었고 그 이후로 고객은 정말로 1개월치 오더를 주었고 납기도 명확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자신감 있게 재고를 1주일분을 확보하는 선행생산방식으로 계획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니 Audit은 출하 1주일 전에 오게 되고 부족한 수량이 생겨도 1주일 사이에 추가 생산을 하여 맞출 수
있게 되어 까다로운 그 고객의 납기는 100%로 맞출 수가 있었습니다.
그 고객은 일본의 고객이었습니다. 정말 까다로웠습니다. 모두가 고객의 요구를 맞추느라 힘이 들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고객이 집착했던 것은 지문이 아니라 브랜드에 대한 존중이었습니다.
제품이 시장에 나가기 전 마지막 순간, 고객이 기대하는 ‘정성’이 담겨 있는지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그 고객의 요구를 맞추다 보니 모든 수준이 이전보다 높아졌습니다.
자재 이동시 세심한 포장을 통한 외관불량 감소, 제품생산 시 작업자의 작업 도구 방식의 변화, 제품의 보관 / 이동시의 관리방법 변화, 설비와 제품의 운영/관리 수준강화 등 그 고객 덕분에 힘들었지만 내실을 기하는
기회가 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