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서영 Oct 24. 2022

산후우울증 일기(7) solid

워킹맘 다이어리

태어난 지 7개월이 된 우리 둘째. 아침에 일어나면 둘째의 손바닥 밑을 긁는다. 말랑하고 촉촉한 손바닥 안에는 새카만 먼지들이 쌓여있다. 둘째의 두 주먹 안에는 온 우주의 먼지가 있다. 매일 쓸고 닦는데도 집안에 쌓이는 먼지처럼 둘째의 손 안에는 매일 먼지가 가득 찬다. 내 머릿속은 둘째의 손바닥 안 같다. 어디서 생겨 먹은 지 모를 온갖 걱정과 우환이 머릿속에 이리저리 부지런히 모여든다.

사무실 단짝 동료가 수술로 3주 동안 출근을 하지 못 하게 되었다. 그 핑계로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기로 한다. 일찍 나오니 피곤하기는커녕 정신이 멀쩡해진다. 이래저래 아이들 양육문제로 일을 그만두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것이 무색해지게 나는 출근하는 것을 좋아한다. 출근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주말 동안 남편과 시댁의 배려로 둘째만 돌보며 집에서만 주말을 보냈다. 요즘 주말이 주말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쉬는 것이 쉬는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예민한 편도 아니고 남편이 육아와 살림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나 하나만 정신이 멀쩡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 같아서. 그게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든다.


퇴근길, 새로 생긴 고깃집을 보고 며칠 전 고기를 먹고 싶다던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여보, 오늘은 여기 어때?" 그렇게 금요일 저녁 우리는 외식을 하게 됐다. 2차로 치즈케이크에 글라스 와인을 마시며 남편과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나의 우울이 설명될 수 있다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설명이라는 말, 납득이라는 말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말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 말에 절망감이 드는 내 마음으로 인해 내 우울증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더 우울감이 들었던 것 같다.


약도 열심히 먹고 산책도 열심히 다니고 동료들과도 대화도 많이 나눈다. 집안일도 더 하려고 일찍 일어나고 아이들 앞에서 우울해지지 않으려 일부러 깨방정을 떨어보기도 한다. 그렇게 괜찮은 하루를 보낸 거 같다가도 갑자기 마음이 무너진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다. 우울증에 대한 콘텐츠를 많이 찾아보는 편이며, 관련 책도 읽는다. 어떤 정신과 전문의는 "미시적 안목과 거시적 안목을 둘 다 볼 필요가 있다"라고 한다. 내가 그간 한 노력은 미시적 안목 안에서 하는 노력이다. 거시적 안목이란 우울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글을 읽자마자 나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축근무를 하며 퇴근하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 우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장 단축근무를 그만두어야 한다.


단축근무 4년. 벌써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축근무를 하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걸 깨달은 그 날 바로 남편에게 단축근무를 그만하고 싶다고 말해버렸다. 나는 남편의 표정을 계속 살폈다. 콧방귀를 뀌면 어쩌지. 2시간 일찍 퇴근하면 당신에게도 좋은 거 아니야? 이렇게 넘겨버리면 어쩌지. 그럼 우리 맞벌이 생활은 어쩌고? 반문하면 어쩌지. 다행히 남편은 나쁘지 않다는 표정으로 "생각해보겠다"라고 답해주었다. 진작 말할 걸 왜 참았을까. 고쳐 누워 다시 생각하니 나 조차도 내가 왜 우울한지 그 원인을 잘못짚고 있었던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간 다 가족을 위해서고, 나를 위해서라고 여겨왔다. 내가 일을 해야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고, 아이들을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내가 내 속에 조그마한 품 만들어줬다면 살만 했을 텐데. 쓸고 닦을줄만 알았지 마음을 진짜 비워내는 것은 한번도 해보지 못 한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산후우울증 일기(6)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기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