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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영 Dec 18. 2023

여전히 사랑

Born to Learn

지난 주말 서울에 있는 동생네로 속초에 사는 엄마가 올라왔다. 엄마와 동생네를 보러 4살, 1살 아이들을 데리고 일산에서 신촌까지 퇴근하고 M버스를 올랐다. 비가 그친 후 유독 매서웠던 칼바람과 버스 안의 따뜻한 온기가 아이들을 노곤하게 했는지 둘 다 버스 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버스에서 내릴 때 겨우 아이들을 들쳐 엎고 내렸는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린다. 남편생각이 많이 났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겨우 택시를 잡아 동생집에 도착했다.

동생집에 들어와 엄마와 동생의 승진과 출간소식에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요즘 내가 꽂힌 책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 나는 요즘 운동과 공부에 꽂혔어."


요즘하고 있는 폴댄스와 유대인의 공부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에리히프롬(유대인)까지 수다가 이어졌다. 그때 벌떡 일어나는 동생은 에리히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들고 왔다. 피를 나누고 살을 비비며 지낸 이게 바로 내력이라는 건가. 척하면 척으로 대화주제들이 이어졌다.


"나는 이 책 어렵더라." 동생이 말했다.


"에리히 프롬 어렵지.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그거야. (참고로 이 책 안 읽음. 에리히 프롬 다른 책들만 읽음.) 진짜 사랑을 해야 한다. 진짜 삶을 살아야 한다. 에리히 프롬이 이렇게 밖에 쓸 수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봐야 해. 에리히 프롬도 유대인이었거든. 나치 집권을 겪고 미국으로 망명해 멕시코까지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에리히 프롬은 진짜 삶을 살고 싶어 했어. 에리히 프롬에게 한 문장 한 문장이 생존이자 인류였거든. 얼마나 무거웠을까. 문장을 이해하려기 보다 행간을 이해해야 해."

에리히 프롬에 꽂힌 이유도, 요즘 내가 꽂힌 운동도 공부도 결국 삶을 사랑하기 위함이다. 운동에 관심을 두게 된 건 내 몸을 건강하게 하고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삶을 사랑하기 위함이고, 공부 또한 공부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이해한 세상으로 삶을 사랑하기 위함이다. 운동과 공부가 삶의 화두라고 말했지만 실은 사랑이 화두였던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하는 엄마는 하루종일 넷플릭스로 브리저튼 외전을 정주행 했다. 브리저튼 외전은 영국의 조지 국왕과 어린 샬럿 왕비의 결혼 스토리를 담은 이야기로 브리저튼 유니버스의 속편이다. 브리저튼 시리즈를 본 적은 없지만 그 시대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내가 만약 그 시대 사람이라면 저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를 상상했다. 마흔 살이나 차이나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엄마와 동생네와 작별인사를 하고 아이들과 다시 버스에 오르는 길, 세찬 눈바람에 아이들 콧잔등이 새빨개졌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얼굴 자꾸 떠올랐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오기로 벌어진 일, 후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어렵다는 에리히 프롬 책 행간만 읽었지, 사랑의 행간을 전혀 읽지 못했다. 지난밤을 돌이켜보면, 또 지난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면 누구의 잘잘못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돌아볼 일이었는데, 그 시절 우리가 가졌던 건 너무나 많았고, 나의 모든 행위는 이것들을 다시 되찾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삶도 사랑도 문장을 이해하려기 보다 행간을 이해해야한다.


나의 화두는 여전히 사랑. 오늘도 사랑을 글로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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