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n to Learn
지난 주말 서울에 있는 동생네로 속초에 사는 엄마가 올라왔다. 엄마와 동생네를 보러 4살, 1살 아이들을 데리고 일산에서 신촌까지 퇴근하고 M버스를 올랐다. 비가 그친 후 유독 매서웠던 칼바람과 버스 안의 따뜻한 온기가 아이들을 노곤하게 했는지 둘 다 버스 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버스에서 내릴 때 겨우 아이들을 들쳐 엎고 내렸는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린다. 남편생각이 많이 났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겨우 택시를 잡아 동생집에 도착했다.
동생집에 들어와 엄마와 동생의 승진과 출간소식에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요즘 내가 꽂힌 책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 나는 요즘 운동과 공부에 꽂혔어."
요즘하고 있는 폴댄스와 유대인의 공부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에리히프롬(유대인)까지 수다가 이어졌다. 그때 벌떡 일어나는 동생은 에리히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들고 왔다. 피를 나누고 살을 비비며 지낸 이게 바로 내력이라는 건가. 척하면 척으로 대화주제들이 이어졌다.
"나는 이 책 어렵더라." 동생이 말했다.
"에리히 프롬 어렵지.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면 그거야. (참고로 이 책 안 읽음. 에리히 프롬 다른 책들만 읽음.) 진짜 사랑을 해야 한다. 진짜 삶을 살아야 한다. 에리히 프롬이 이렇게 밖에 쓸 수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봐야 해. 에리히 프롬도 유대인이었거든. 나치 집권을 겪고 미국으로 망명해 멕시코까지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에리히 프롬은 진짜 삶을 살고 싶어 했어. 에리히 프롬에게 한 문장 한 문장이 생존이자 인류였거든. 얼마나 무거웠을까. 문장을 이해하려기 보다 행간을 이해해야 해."
에리히 프롬에 꽂힌 이유도, 요즘 내가 꽂힌 운동도 공부도 결국 삶을 사랑하기 위함이다. 운동에 관심을 두게 된 건 내 몸을 건강하게 하고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삶을 사랑하기 위함이고, 공부 또한 공부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이해한 세상으로 삶을 사랑하기 위함이다. 운동과 공부가 삶의 화두라고 말했지만 실은 사랑이 화두였던 것 같다.
영화를 좋아하는 엄마는 하루종일 넷플릭스로 브리저튼 외전을 정주행 했다. 브리저튼 외전은 영국의 조지 국왕과 어린 샬럿 왕비의 결혼 스토리를 담은 이야기로 브리저튼 유니버스의 속편이다. 브리저튼 시리즈를 본 적은 없지만 그 시대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보며 '내가 만약 그 시대 사람이라면 저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를 상상했다. 마흔 살이나 차이나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엄마와 동생네와 작별인사를 하고 아이들과 다시 버스에 오르는 길, 세찬 눈바람에 아이들 콧잔등이 새빨개졌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얼굴 자꾸 떠올랐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오기로 벌어진 일, 후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어렵다는 에리히 프롬 책 행간만 읽었지, 사랑의 행간을 전혀 읽지 못했다. 지난밤을 돌이켜보면, 또 지난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면 누구의 잘잘못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돌아볼 일이었는데, 그 시절 우리가 가졌던 건 너무나 많았고, 나의 모든 행위는 이것들을 다시 되찾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삶도 사랑도 문장을 이해하려기 보다 행간을 이해해야한다.
나의 화두는 여전히 사랑. 오늘도 사랑을 글로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