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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을 잡은 손, 내 삶을 잡다 - 스프레드

폴댄스 에세이 「폴 타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by 최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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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댄스 수업을 등록한 결정적인 이유, 선생님의 어깨가 정말 멋있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어깨가 너무 우람하여 싫다고 두 손으로 어깨를 가리지만, 나는 또 그 어깨를 감싸고 있는 팔근육에 눈이 간다.


작고 여리한 어깨가 아닌, 각지게 떨어지는 근육질의 어깨 그리고 근육팔까지. 멀리서 볼 땐 잘 몰랐지만 수업을 들을 때마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 하고 선생님의 크고 멋진 근육들에 자꾸 눈이 갔다.


선생님처럼 멋진 근육을 가지고 싶다. 사실 요 근래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하면 가지고 싶은 것도 강해지는 것 같은데, 살고자 하는 마음이 별로 없으니 가지고 싶은 것도 없고, 더 가만히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던 것 같다. 악순환의 고리다. 내버려두면 더 나빠지는걸 알면서도 내버려둔다. 힘이 없어 힘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더 힘을 잃는다.


힘을 주지 않으면 힘이 더 없어진다. 반대로 힘을 조금씩 주기 시작하면 힘이 생긴다. 나도 알아차리지 못 할 정도로 야금야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에 치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내가 선생님 같은 멋진 몸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기적 같은 변화다. 폴 앞에 서기까지, 삶 앞에 서기까지. 여기까지 오는데 참 많은 마음근육을 썼다.


오늘은 폴댄스 수업이 있는 날. 안경을 쓰기보다 렌즈를 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렌즈도 꼈다. 오랜만에 출근해서 안경 대신 렌즈를 끼고 있으니 다들 어디 가냐고 묻는다.


“폴댄스 수업 가요.”

“폴?”


다들 짜맞춘 것처럼 반응이 똑같다. 듣도 보도 못 했으니까 다들 그런 생경하다는 얼굴들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신이나서 더 자랑한다. 사귄지 얼마 안 된 애인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들뜬 표정을 지어보이며 학원 문을 열었지만, 내 마음과는 다르게 이번 수업은 녹록치 않았다. 이번에는 나 포함 2명의 수강생 밖에 없어 선생님의 더 큰 관심을 받으며 수업이 진행됐다. 보통 운동수업은 수강생이 적을수록 비싼 값을 주고 배워야할만큼 수업의 퀄리티가 올라가서 받고 싶어하겠지만, 폴댄스 학원 수업은 수강생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만큼 폴에 올라가야 할 텀이 짧아지기 때문에 솔직히 수강생이 많은 것이 더 재밌고 덜 힘든 것 같다. 쉬는 시간동안 힘을 모았다가 폴에 오를 수 있어서 좋고,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눈으로 익히며 동작을 살피기 좋은 것 같다.


‘스프레드’라는 동작은 양손으로 폴을 높이 잡고 쭈욱 몸을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이다. 양손을 야구방망이 잡듯이 잡는 그립이라고 해서 베이스볼 그립이라고 부른다. 간단한 동작처럼 보이지만 엄청 힘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롯이 두 팔과 등 근육을 이용해 내 몸을 끌어올려야 하는 동작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매달리는 것조차 힘들어 자꾸 폴에서 미끄러졌다. 손과 팔에만 힘을 쏟게 되면 말 그대로 매달리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손목이 아닌 등 근육을 써야한다. 스프레드 동작을 잘 하면 선생님처럼 멋진 근육질 어깨를 가질 수 있겠다고 되뇌였지만 자꾸 손바닥만 아팠다. 광배근.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고, 어디 붙어 있는 근육인지도 몰랐다. 괜히 어깨 너머로 말캉한 등살을 주물거렸다.


나는 등근육이라는 것을 아예 쓰지 못 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저렇게 쉽게 하는데 나는 왜 안 될까. 자꾸 힘이 빠져 시작도 못 하고 폴에서 미끄러졌다. 한마디로 오늘의 폴수업은 시작과 동시에 말려버렸다.


폴 위에 올라가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불과 세 번의 수업만으로 얻은 깨달음이다. 폴만 바라보면서 붉어진 손바닥만 주물러본다. 폴댄스는 폴을 잡아야 동작들을 할 수 있는데 폴 자체를 잡지 못 하니 난감하다. 폴 앞에서 아무 것도 못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선생님은 다양한 동작들을 알려주셨고, 이 동작을 해보면 어떠냐, 저 동작을 해보면 어떠냐 제안했지만 한번 힘이 빠지니 시작을 못 하고, 시작을 못 하니 그 어떤 동작들도 다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1회 수업비용이 날아가는 걸까.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계속 수업비용을 날려먹는 것이 아닐까. 하라는 동작이 안 되니 이상하고 불편한 결론에만 다다랐다.


아무 것도 못 하는 나도 난감했지만 선생님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어떡하죠?”라고 묻는 내게 선생님이 “어떡하죠?”라고 똑같이 되물었다.


그렇게 잠시 선생님이 다른 수강생을 가르치고 있는 사이, 나는 바닥에 앉아 잠시 몸을 쉬었다. 땀난 것도 닦고 폴도 닦고 그립제도 다시 발랐다. 조금 쉬고 다시 스프레드 동작을 시도했다. 얼떨결에 스프레드 동작이 성공했다. 잠깐 쉬니 힘이 다시 모아졌다.


안 풀릴 때는 쉬면서 힘을 모으자. 스프레드를 할 때는 폴에 가슴을 밀착하는 것이 더 안정적이라고 하셔서 폴에 가슴을 대려고 노력했지만 납작가슴인 나에게는 아무리 가슴을 들이밀어도 폴에 닿지 않았다. 근육도 없지만 가슴도 없다. 뽕이라도 차고 와야 할 것 같다.


“되네요! 잘 하셨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칭찬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변형 동작들을 제안했다. 폴을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다리를 꼬아 앉은 다음, 높이 잡고 있던 손을 가슴 쪽으로 내리고 고개를 젖혀 허리를 휘어보자고 했다. 선생님이 동작을 가르쳐줄 때는 엄청 가볍고 자연스럽던데 막상 그 동작을 하려니 허리가 하나도 휘지 않았다. 재난 상황에 구조 되는 사람 같아 보였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내게 처음 치고 잘 한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칭찬이 끝나기 무섭게 다 좋은데 ‘발끝 포인’이 되면 더 예쁠 것 같다고 했다. 집으로 가는 길 찍은 영상들을 다시 보니 정말로 발끝이 포인이 되면 더 예쁘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더 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폴댄스는 내 몸을 통해 나의 가장 밑바닥 부분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운동이다. 노력할수록 더 깊게 바닥까지 갈 수 있다. 몸을 통해 느낀 감각의 심연, 그 텅빈 곳을 오롯이 나의 힘으로 채워주고 싶어진다.


집에 돌아왔는데 남편이 나를 황급히 불러서 가보니, 남편은 침대 끝을 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 커버를 매트리스에 씌워야한다고 매트리스 좀 들어보라고 한다. 참고로 우리집 침대는 아이들과 함께 자기 때문에 패밀리침대다. 특수 제작 특대형 패밀리 침대.


“여보, 폴 타다 와서 너무 힘든데.”

죽상을 해도 남편은 단호하기만 하다.

“폴 탄다고 생각하고 빨리 올려봐.”


폴을 잡던 양팔이 아직도 얼얼했지만 정말로 폴 탄다고 상상하고 힘껏 들어올렸다. 그래, 이런 생활근육도 폴 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몸을 통해 느낀 감각은 폴 탈 때만 생겨나는게 아니라 늘 내 몸 안에 있다. 폴을 타서 생긴 근육으로 일상에도 도움을 주고, 일상에서 만든 생활근육이 폴 타는데 도움을 주고, 폴근육과 생활근육 다 내 것이다.


일상에서 힘 쓸 일은 너무 많다. 특히 육아는 체력싸움이다. 화내고 울면서 말하는 아이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어야하는 청력, 갑자기 다칠 위험에 빠진 아이를 구해야하는 순발력, 합이 족히 25kg는 나가는 아이들을 동시에 양팔로 들어 올릴 때의 근력과 그것을 장시간 지속할 수 있는 전신지구력, 나도 춥지만 추운 아이들을 위해 내가 입고 있는 외투를 벗어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바이러스에서 절대 아프지 않는 방위체력, 새벽마다 우는 아이들로 생긴 불면과 남편의 잔소리로 스트레스에 노출된 상황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정신체력까지. 내 감각은 폴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늘 깨어있었다. 그저 그 바닥을 들여다봤을 뿐인데, 마법 같은 주문이 하나 생겼다. ‘폴 탄다고 생각하자.’


폴댄스 인스타그램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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