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뇌의 비법 4. - 죄책감 심어주기.
이전 글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여 나와 피해자들을 공짜로 부려먹는 J선생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다. J선생이 우리를 부려먹기 위해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가 '본인이 몸이 안 좋다는 것'이었는데, 오늘은 그것에 초첨을 맞춰서 얘기해보려고 한다.
"내가 네년들 때문에 엉덩이가 성할 날이 없어! 주사를 하도 맞아서 주삿바늘 꽂을 자리도 더 이상 없다! 그러니까 네년들은 나한테 잘해! 알겠어?"
J선생 밑에 있으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다. J선생은 우리를 가르치느라 피로가 쌓여 매일 수액을 맞고, 본인의 엉덩이가 멍으로 가득해서 더 이상 주사기를 꽂을 자리도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는 J선생의 주장일 뿐 실제로 엉덩이를 까보지 않았으니 그 말이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네년들 때문에 내가 피곤하고 아프니까, 네년들 때문에 내가 고생하니까, 네년들 때문에 머리가 아프니까...
난 J선생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우리가 뭘 어떻게 했길래 그러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J선생이 우리 때문에 아플 이유가 전혀 없었다. J선생이 우리에게 그림을 어떤 식으로 가르치는지 아는가? 일단 뭘 그릴지 정해주고, 한참 그리고 있으면 와서 쓱 보고 간다. 그리고 한 마디 던진다. "음, 실력이 좀 늘었네?" 혹은 "정신 똑바로 안 차리냐? 저딴 걸 그림이라고 그려?" 놀랍게도 이게 끝이다. 부족한 부분이 어디인지, 뭘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는 내가 스스로 파악해야 한다. 월 45만 원의 학원비를 내지만 내가 스스로 그림을 그리다 오는 게 전부라는 뜻이다.
내가 J선생이라면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나이에 비해 건강했을 것이다. 왜냐고? 시간이 많으니까. 실제로 J선생은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음악을 틀어놓고 요가를 하거나 방에 들어가서 자는 게 일상이었다. 초등학생 애들이 오면 J선생은 쉬고 우리가 대신 애들을 가르친다. 본인 아들 밥 먹은 것도 우리가 설거지하고, 심지어 화실 청소까지 전부 우리가 다 한다. 심지어 J선생이 키우던 강아지가 밤새 여기저기 싸놓은 똥오줌도 우리가 다 치웠다고 하면 믿겠는가?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아직 어렸고, 네년들 때문에 아프다는 J선생의 반복적인 말에 세뇌당하고 말았다. J선생이 우리를 위해서 골머리를 썩고 희생하고 있다고 믿게 되어버렸다. J선생이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정말 불행하게도 착한 아이였던 우리는 그 죄책감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노예가 되고 말았다. 만약 우리가 덜 착했더라면 J선생의 수법에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그런 사례를 봤기 때문이다(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다.)
J선생은 우리 때문에 본인이 아프므로 병원에 갈 때 우리 중 한 명을 콕 집어서 데려가곤 했다. 마치 비서를 데리고 다니듯이 옆에 붙어서 J선생의 빨간색 장지갑을 들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내가 비서로 따라갔던 날, 충격적인 얘기를 듣고 말았다. 주사를 맞고 나온 J선생에게 카운터에 있는 간호사가 이러는 것이다.
"오늘 태반주사하셔서 0만 원입니다."
순간 내 머릿속이 띠용! 했다. 지금은 태반주사를 피로회복 목적으로도 맞는 것 같은데, 당시만 해도 태반주사라고 하면 미용주사라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들리던 얘기로는 태반주사를 맞으면 10년이 젊어진다나? 우리 때문에 아파서 주사를 맞는다더니 그게 사실 미용주사라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황당하던지. 물론 정말 피로회복 목적으로 맞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피로를 우리가 준 게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도 내가 그 주사가 미용 목적이었다고 믿는 이유가 따로 있다. J선생은 햇빛 알레르기가 있다며 항상 모자를 쓰고 다니고 주기적으로 얼굴이 빨갛게 올라오곤 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피부과에서 박피 시술을 해서 그런 거였다. 외모에 신경 쓴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J선생이 거짓말로 똘똘 뭉친 인간이었다는 걸 그때 진작에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