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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찬 Aug 31. 2021

영혼 착즙기와 파마산 치즈 사이

월간 에세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8월]


메트로놈 10 사이에 머무는 


불안은 작은 틈새에서 새하얀 우박처럼 딱딱하게 피어오른다. 오소소소 피어나 토도도독 바닥에 기어다니는 몸 주변에 흩어진다. 엇박자와 엇박자 그리고 또 엇박자가 뒤엉킨 중에도 기어코 비워진 찰나, 소음이 사라진 미세한 순간, 숨 한 번 헙- 들이마실 수 있는 여백에, 불안은 불쑥 끼어든다. 목구멍에 들숨과 함께 들어온 소금 같은 돌조각 때문에 날숨마저 엇박자로 헛기침이 되어 내뱉어진다. 저마다 다른 박자로 까닥이는 메트로놈 10개 정도 사이에 갇힌 기분은 그런 것이다. 


그곳에 계속 머무르는 일. 계속 비껴가는 초점들에 헛헛함을 느끼며 엇박자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사이. 최소한의 힘으로 계속할 수 있는 건, 저마다 다른 박자로 까닥이는 어지러운 몸짓을 계속 살피고 고쳐보려는 시도뿐이다. 조금 더 힘을 낸다면 언젠가 이들을 조화롭게 엮기 위한 숱한 고민을 지속하는 것. 메트로놈 10개 정도 사이에 갇힌 일상은 그런 것이다. 


양손으로 귓가를 애써 틀어 막아 겨우 만든 불완전한 침묵을 그나마 숨쉴 수 있는 틈이라 여기며 안도하는 것. 그것이 그런 일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다. 


타악- 타악- 거리는 소리가 기묘하게 중첩되며 쉬지 않고 울려대면 머리가 아프다. 언제쯤 들어 줄 만한 호흡으로 까닥일까. 알 수 없다. 10년, 2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손이 느리면 느린대로, 박자를 고치려는 움직임이 서툴면 서툰대로 하나씩 들여다보고 다시 맞춰보고, 다른 것을 들여다보고 맞춰본다. 하다보면 얼마나 바보같은 행위인지 깨닫게 된다. 근데 그런 바보같은 반복과 속도로라도 살아가려는 삶이 있다. 이제는 모르겠다며 멈추는 게 더 두려워서, 도망치는 나 자신이 치가 떨릴 정도로 싫어서, 어쨌든 시간은 계속 앞으로 흘러가니까, 등 떠밀리듯 쏟아지는 ‘이유’라는 가면을 쓴 두려움 때문에. 불안을 벗어나지 않고 마주하는 삶이 있다. 어딘가에는 그런 삶이 있다면 함께 기대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영혼 착즙기와 파마산 치즈 사이

 [2021년 8월에 대한 나의 감상]

 : 보이지 않는 것을 짜내고, 짭잘한 것을 갈고 또 갈았던 한 편의 삶. 혓바닥 위에 잘게 남았던 소금기 같은 일상. 따끔한 감각. 찔끔 나오는 눈물로 곳곳을 점 찍었던 시간. 


언젠가 내 자화상을 파마산 치즈에 빗대어 그리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그 아이디어를 - 진심을 - 말해보기도 했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답해줬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하는 일들에 파마산 치즈를 곱디 곱게 갈아 소복히 얹은 장면을 떠올렸다. 가끔 잔인한 감상도 떠올렸지만 굳이 잡아두지 않고 흘려보냈다. 그런 게 꼭 나같다는 생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심상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바람 한 번 훅 불면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나의 노력들. 그렇다고 없으면 감칠맛 나지 않아 섭섭한 나의 영혼 가루들. 퍼먹으면 맛있을까 싶은 영혼 착즙의 결과물들. 입가에는 비소를 띄우고 눈가에는 애정어린 안쓰러움을 띄우고, 고개를 살풋 숙여 기묘한 요리를 들여다 본다. 참으로 향긋하구나. 영혼 한 점 없는 목소리로 읊조린다. 그야 당연하다. 이걸 완성하기 위해 착즙된 내 영혼은 이미 껍데기뿐이니. 


내 노력의 결과물은 늘 이런 식이었다. 참으로 어여쁘고 불쌍하지 않은가. 거울 앞에 앉은 나는 뭉툭한 포크과 잔뜩 흠집이 난 나이프를 들고 나의 결과물를 샅샅히 살펴본다. 독을 타지는 않았는지, 죽은 벌레가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 는 농담이다. 아직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요리지만 나는 기꺼이 먹을 것이다. 그 맛을 가장 깊이 헤아리고 이해하고 비평할 수 있는 이는 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요리 하나를 위해 착즙된 내 영혼을 다시 채워줄 수 있는 건 이 요리뿐이다. 모순적이지만 대체로 나의 삶은 그렇게 지속되고자 한다. 


감각이 혀를 감싸고 불현듯 밀려오는 시큼함에 눈꼬리에 미약한 눈물이 맺힌다. 이런, 치즈에 문제가 있나. 계륵같은 나의 노력이 지녔을 어느 가치를 그렇게 가늠하기 시작한다. 망한 요리인가. 근데 시큼한 게 더 좋은 맛일 수도 있잖아. 이건 맛있네, 이건 별로고, 아직 어느 정도가 좋은 온도인지 모르는구나. 이건 전보다 잘 익혔네. 뭐, 나쁘지 않네. 모호한 비평의 기록을 남긴다. 이후 또 영혼을 착즙하고 파마산 치즈를 갈고 있을 조금 이후의 나를 위함이다. 언제쯤 완벽한 요리를 완성할 수 있을까. 언제쯤 거울 하나 앞에 두고 반복되는 석연치 않은 요리와 식사의 반복을 끝낼 수 있을까. 


-라고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던 때가 있었다. 아마 평생 그래야 할 터인데. 웃는 것도 아니고 시무룩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표정도 아닌 나다운 표정 - 입가에는 비소를 띄우고, 눈가에는 애정어린 안쓰러움을 띄우고 - 앙 다문 입을 오물거리는 거울 속의 나를 그저 응시할 뿐이다. 조금 힘이 난다면 이렇게 말한다. “잘했어.” 그뿐이다. 정말 잘 한건지는 나도, 저 안의 나도 알 수 없다. 그냥 딱 그만큼의 답만 해야 조금 더 살아갈 힘을 사소한 고민에 쏟지 않고 비축해둘 수 있어서. 가장 모호하고 간결한 답을 했을 뿐이다. 당근에 짓눌린 토마토 소스 향이 입안에 짙다. 이상하지만, 대체로 나의 삶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목도. 흔들림. 의문들.

 1)

누군가는 목도만으론 너무 미적지근하다고 의문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일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말이다. 그러게 말이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이 ‘좋아하다’라는 동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걸까. 


 2)

가끔 저주가 아닌가 생각한다. 다른 이가 생각하는 기준들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는 내 삶의 궤적을 보며 내게 저주를 내린 우연의 사건들과 그 속에서 다시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리곤 하던 나 자신들을 생각할 때가 있다. 그렇게 놓쳐온 게, 지금 놓치는 게 얼마나 많은지 헤아리곤 한다. 나를 알아갈 수록 밀려오는 건 후회뿐이었다. 하지만 나를 마주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지치는 일상이었다. 


남들 시선에 끼워 맞춰 내가 이걸 좋아한다고, 좋아하려고 이렇게 노력한다고 증명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때에 맞춰 떠오른 질문은 꽤나 아렸다. 좋아하는 일마저 그런 굴레에 갇혀있었다니. 참으로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하든 ‘아직도’를 내걸었다. 그 ‘아직’의 기준은 보통 내가 아닌 바깥에 있었다. 예컨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드는 식이다. ‘아직도 이런 고민을 반복하는 구나’라는 생각. 아, 갑자기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진다. 


 3)

좋아한다는 걸 증명하는 일과 나를 조금 더 지키는 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이건 대체 무슨 질문인 걸까. 


 4)

아직 내 그릇이 이 정도뿐일 수도 있다. 요즘의 내가 그런 상태인 것일 수도 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괴로움이 있다. 그 괴로움에 짓눌리면서도 내면의 초점을 잡는 무게의 추는 늘 그쪽으로 향했다. 내가 그것을 향해 온몸을 기울이는 방식은 늘 그렇게 고요했다. ‘제 추는 이만큼 기울였어요. 이만큼의 삼각형을 그리고요, 이렇게 흔들려요,’ 그만둘까 싶었다. 명확한 수치로 형언할 수 없음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만 같은 아이러니에 부닥친다. 나는 일렁이는 걸 자명하게 증명하는 폭포보다는, 바람 몇 점에 겨우 일렁이는 순간을 보이곤 하는 호수 같은 방식으로 좋아해 온 것일지도 모르는데. 물론, 내가 흘러가기를 애써 거부하는 수동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다만, 나는 그래왔는데. 그만큼 내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은 한참동안이나, 미세한 요철마저 시선에 담을 때까지 응시하며 그것을 참으로 좋아해왔는데. 


+

[무제]

어린 아이의 철없는 투정이다. 이제 이 침침한 동화책에서 나올 필요가 있다. 결국 맞닿아 있는 현실을 외면하는 건 이제 나조차도 스스로 지긋지긋하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살아왔던 시간을 져버리고 싶지는 않다. 이 습하고 눅눅한 이야기를 가장 아늑한 책과 책 사이에 꽂아두고, 다시 다른 것을 펼쳐 막연한 백지 위에 펜촉을 가져다 두어야겠지. 어디에 어떤 점부터 찍어야 할까, 또 다시 어려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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