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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찬 Sep 30. 2021

9월의 꽃말은 ‘찰나’였다.

월간 에세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하여 [9월]


이 '찰나(刹那)'는 산스크리트 어의 '크샤나'를 음역한 아주 짧은 시간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다. 찰나같은 인생을 영원한 인생으로 바꾸는 것이 불교 철학이다. '찰나(刹那)' 또는 '차나(叉拏)'라고도 표기하며 '일념(一念)'이라는 뜻으로 번역한다. 한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을 일념(一念)이라고 하고 발의경(發意頃) 혹은 생장(生藏)이라고도 한다. 극히 짧은 시간, 순간, 시간의 최소단위를 말한다. 찰나를 현대 시간으로 환산을 하면 '75분의 1초'라고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관념에서는 느낌조차 없는 그런 상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찰나 (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아시아편))


[75분의 1초 같은 30일을 2800여 자로 해부하기.]



: 9월의 꽃말은 ‘찰나’였다. 


시간에 꽃말이란 단어를 갖다 붙인 생뚱맞은 소리. 지난 9월이 찰나처럼 느껴진다는 걸 굳이 이렇게 표현해 본다. 나팔꽃처럼 아침에 잠시 피다 진 듯이 하루가 반복되고, 슬 때가 되어 나뭇가지에 아스라이 걸린 채 바람과 함께 자연스레 톡 떨어질 순간을 기다리는 낙엽마냥 나의 위치와 시간을 응시한 한 달이었다. 


지금부터 그 ‘찰나’를 찬찬히 해부해보려 한다. 말도 안 되게 막연하고 희미한 것을 길게 늘여서 읊고 싶어 하는 게 나니까. 



: 1. ‘지휘관’


10월. 11월. 12월. 2021년을 호명할 수 있는 ‘월’ 단위의 숫자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저 지나갈 뿐인 시간을 숫자 단위로 구분한 것이 자의적이라 생각하곤 하지만(시간을 ‘지나간다’라고 하는 것 역시 인간의 막연한 감각에 의존한 자의적인 표현일 것이다) 결국 그 숫자들에 기대어 조금 더 시간이란 걸 선명하게 인식한다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내가 가진 나이가 두렵고, 내가 자라나는 속도와 달리 시시각각 변하는 숫자 단위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결국 추상적인 기호일 뿐인 숫자들에 숨이 막힐 때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조금 더 선명한 기점 삼아 변화를 그려보기도 하고 새로운 시작의 순간으로 삼아보기도 한다. 


잠시 그 기호들에 기대어 내가 살았던 시간을 회고하자면. 1월부터 4월까지는 계속 방황했고, 그 이후부터 8월까지는 나로서의 기준 없이 흔들리며 살아온 지난 모습들을 자책하고 혐오하기도 하며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9월에는 내가 나 자신으로 향하는 고민을 넘어서, 내 울타리 너머에 있는 다른 이들과 나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특별한 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면서도, 지루하기는커녕 순식간에 지나간 것처럼 느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안쪽은 여전히 전쟁터였다. 그것도 시소 위에서 잔뜩 흔들리며 일어나는 전쟁.


그리고 나는 그 사이를 헤아리며 그 모든 일들을 이끌어갈 수 있는 어엿한 지휘관이 되기를 바랐다. 단단한 두 발로 중심을 잡고 사방의 모든 풍경을 관망하며 보살필 수 있는 지휘관.




: 2. ‘고갯짓’


줄곧 내게 집중하던 시선이 바깥을 향하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는, 그럴 수 있기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나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이는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이 이해하는 나를 마주하고 싶다는 욕구였다. 타인의 평가가 아닌, 타인의 이해로서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고민은, 나로서 존재하려는 나를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 수 있을까- 라는 고민으로 나아갔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이해하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암묵적으로 정해놓은 숫자 단위들이 요구하는 사회적 단계와 내가 살아가는 삶의 속도를 더 늦기 전에 맞추고 싶어서, 어느 정도 준비가 된 느낌과 함께 바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나에게로, 때론 밖을 향해 귀를 기울이기 위해 좌우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일상이 반복되었고, 9월의 초상은 그렇게 얼핏 보면 어리바리한 모습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 3. ‘시소 타기’


걸음마부터 다시 내딛는 기분이었다. 막 세상에 나온 아기가 소리를 내고 걸음을 떼기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이 이런 느낌일까 - 하며 일방적인 이해를 공감하는 것 마냥 반복했다. 말도 버벅거리고, 백지상태가 되며 내가 애써 확인한 것을 다시 의심하고 지워버리는 순간들을 경험했다. 활자로는 서슴없이 말한 것들이 내 몸짓과 목소리로 번역될 땐 다시 불확실한 것으로 변모하고 마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서툰 사람. 부족한 사람. 그런 찰나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런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이렇게 정의했다. 서툰 사람. 부족한 사람. 날것 그대로 나를 인정했다. 대면도 서툴고 사고방식도 뜯어고쳐야 하고 제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부터 연습해야 하는 서툰 사람. 내가 누구인지 아직 잘 모르는 부족한 사람. 


그런 결론들이 주는 감정은 불편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진작에 피했을 것들.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끔찍하고, 후회스럽고, 또 무어라 표현해 볼까. 거머리가 살갗에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소름 끼치며 일어나는 감정들을 나열하면 되겠다.


내면과 외면의 시소 타기는 여전히 명확한 무게의 위치도 가능하지 못한 채 중심 없이 기울이기를 반복했다. 그 상태에 계속 머물며 정확히 바라보려는 연습을 반복하는 건 멀미에 속이 지나치게 메슥거리는 기분을 토할 정도로 만끽하게 했다. 


내가 나를 피하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세상 밖으로 애써 내보내는 일은 그런 순간들의 반복이었다.



: 4. ‘울타리 너머’


1년, 2년, 10년, 20년 후에도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계속 그 자리를 지키게 했다. 부족하고 어리숙하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하기에 더욱이나 피할 수 없었다. 포기할 바에는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자며, 머물 바에는 멍청하게라도 효율적인 사고방식을 찾아보자며 버텼다. 요즘 말로 하자면, ‘존버했다.’ 밀려오는 멀미를 차라리 체화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의 언어는 처음으로 ‘설득’의 근육을 진심으로 갈구하기 시작했다. 단지 혼자 읊는 독백을 넘어서, 타인과 소통하고 서로의 생각을 설득하며 나눌 수 있는 언어. 그로써 비로소 공감하며 연결될 수 있는 공존. 내면을 넘어 외면으로도 성장하고자 하는 바람은 자연스레 그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 5. ‘늦다’


나는 늦었다. 너무 늦었다. 이게 사실이라고 치자.


그런데, 늦었다는 게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삶은 어찌 됐든 유한하기 때문에 늦으면 늦은 대로 시작하는 것이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닌가 싶었다. 포기하면 포기한 대로 다시 시간이 낭비될 뿐이니까. 


어느 개그맨이 말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었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자주 떠올리곤 했는데, 나는 그것을 진짜 늦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로 번역했다.


‘늦었다’라는 감각, 비교, 혹은 막연한 감각은 사실 아무 때나 말해도 그 의미가 효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늦었다’라는 사실 아닌 사실 때문에 우리 삶에 두려움이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불쑥불쑥 끼어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에 쉬지 않고 반복될 ‘늦었다는 후회’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지금 뭐라도 시작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 그렇게 믿으면서 막연함에 자주 멈칫하다가도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곤 했다. 


나를 움직이는 건, 지금의 내가 늦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들에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더 늘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움직이고자 했다. 그만큼 버벅거리고, 효율적이지 못하고, 성과나 의미 하나 없이 반복한 시간들도 있었지만 거기에 메이지는 않았다. 그런 후회들도 진작에 해야 했었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받아들였다. 후회해야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으니까. 지금 후회해야 이후 시간을 살아갈 내가 더 좋은 방법을 찾고 있을 테니까. 


9월이란 찰나는 사실 그렇게 아주 느리고 장황하기도 했다. 뻗은 발걸음의 보폭은 좁을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떨림이 잦고 또 잦았던 시간. 가장 느린 풍경에 몸 담근 빈번한 전쟁 같은 30일이었다. 




: 6. ‘풍경’


그렇게 반복되는 버퍼링에 주저앉다가도 내가 살아간 시간을 일련의 필름에 오롯이 찍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9월이란 한 곡의 음악이 카세트테이프에 담겼다고 상상을 하자면, 중간중간에 긁힌 흔적들이 잦아 노이즈나 예정에 없던 소음이 반복되며 흘러나오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다만 본래 연주하려던 음악과 불청객 같은 소음은 또 그것대로 새로운 하나의 화음을 이룰 거라고 기대를 걸어본다. 


지난 9월은 그런 풍경이었고 시간이었다. 앞에서 바라보면 내면과 외면이라는 두 풍경이 오묘하게 중첩되어 있고, 측면에서 바라보면 얇은 선 하나 그려져 있을 뿐인 찰나의 시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장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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