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적 삶
장을 시작하며 한병철은 하나 아렌트의 <활동적 삶>을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활동적 삶> 이전에는 사색하는 것을 활동하는 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활동에 대해 폄하를 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인 삶의 가치를 복구하고자 활동적인 삶을 옹호한다. 그녀는 인간을 움직이 게 하는 것은 탄생과 영웅성이며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고 본다.
근대에 들어서서 이 활동이라는 것이 노동으로 전락해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래 행동이 라는 것은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인데, 노동으로 전락해버린 활동은 어떠한 것 도 능동적으로 할 수 없고 익명이라는 이름으로 수동적으로 끌려가게 된다는 것이다. 노동사회에 서는 사유도 계산으로 변질된다는 것이 근대를 바라보는 한나 아렌트의 관점이다.
여기까지가 한나 아렌트의 입장이고 한병철은 이에 대해 비판을 이어나간다. 왜냐면 사회는 ‘성 과사회’이기 때문이다. 성과사회에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아를 내팽겨 치지 않는다는 것이 한 병철의 의견이다. 앞선 장에서 살펴봤듯이 인간은 노동을 통해 수입을 얻고 그것으로 자신의 자 아를 구축하며 집단을 이탈한다. <깊은 심심함>에서 살펴본 대로 인간은 멀티태스킹을 통해 항상 사냥을 하고 사냥 당할 것을 우려하는 동물처럼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있다. 한나 아렌트는 어째 서 인간의 활동이 후기 근대에 와서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지는지, 또 왜 항상 신경과민증 상태에 머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답을 못하고 있다고 본다.
이것에 대해 한병철은 후기 근대에서는 현실에 대한 믿음 더 나아가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상 실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집단을 상실하며 완전히 개별적인 자아로 고립된 인간, 세계의 탈서사 화는 인간은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세계의 탈서사화로 자신을 어느 위치에 두어야 할지 모 르는 인간은 자신의 생명이라도 유지하고자 건강에 대한 강박이 생긴다.
이제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을 참고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전에는 범죄를 저지른 특정인만 호모 사케르로 언제든지 죽일 수 있지만 신에게는 바칠 수 없는 생명이 되지만, 후기 근대에서는 모두가 호모 사케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한병철의 입장이다. 더불어서 그렇기에 호모 사케르 는 더 이상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을 띤 다. 앞서 살핀 언제든지 사냥하고 사냥 당할 수 있다는, 과잉 활동의 히스테리는 탈서사화-극단 적 허무-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라고 본다. 성과사회는 결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해 서 내제화된 강제를 만들어낸다. 이 자기 착취에서 인간은 더욱 무력해져간다.
장을 마무리하며 한병철은 다시 한나 아렌트를 소환한다. <활동적 삶>의 마지막 장에서는 이전 의 전통적 입장(‘사색하는 삶이 활동적 삶보다 우위에 있다’)를 옹호하기 시작한다. ‘사유는 활동 적 삶의 활동 가운데서도 가장 활동적인 것이며 순수한 활동성의 면에서 모든 활동을 능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변인데, 한병철은 이것을 임시변통으로 본다. 오히려 여기서 강 조되고 있는 활동성은 히스테리와 닮아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성과사회에서 활동이 라는 것이 히스테리의 요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며 이 장을 끝낸다.
보는 법의 교육
이 장에서는 활동과잉이 왜 히스테리인지에 대해서 논의를 이어나간다. 먼저 니체가 설파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에 대해서 언급한다. 거기서 니체가 가장 중요하게 생 각하는 것은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을 배우고 본 것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그렇게 나온 것 을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지 고상한 문화가 된다는 것이 니체의 의견이다. 이렇게 하면 인간은 눈으로 하여금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즉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인데, 모 든 충동에 바로 반응하는 것은 천박성이라기보다는 탈진에 가깝다는 것이 한병철이 덧붙이는 의 견이다. 한나 아렌트는 활동이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지만, 한병철은 니체에 동의 하며 사색하는 삶이야 말로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본다. 사색이라는 것은 자극에 저항 하는 것이며 이는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이 된다는 것이다. 앞서 <활동적 삶>에서 한병 철이 결론을 내렸듯이 활동과잉은 히스테리가 되며, 히스테리가 된다는 것은 아무 저항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주구장창 이야기하던 수동성에 끌려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색적인 삶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중단하는 본능”이 보는 것을 통제하는 것이다. 현 대에는 중단이 거의 없다. 이에 한병철은 분노할 것을 촉구한다. 짜증과는 구분되는 분노는 현재 에 대한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현재를 중단시키고 현재를 연장한다. 분노는 새로운 상황이 시작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이라는 것이 한병철의 설명이다. 하지만 현재는 긍정성의 과잉 사 회이다보니, 분노같은 부정성에 바탕을 감정은 약화된다. 부정성의 부재는 인간은 계산하는 기계 로 전락시킨다. 한병철은 마지막 문단에서 활동과잉이 역설적이게도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 남겨놓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성과사회 다시 말해 긍정성 과잉의 사회라고 이야기하며 이 장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