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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은 Jun 09. 2023

<프로이트와 20세기> 제6장 포드주의, 프로이트주의

제6장 포드주의, 프로이트주의 그리고 모더니티

발제자 박상은


 전후의 미국 포드주의는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개괄적으로 포드주의가 프로이트주의를 만나 노동자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으로 이 장을 시작하고 있음.

 초기 포드는 ‘통제, 질서, 계획’를 통해 원가를 낮추는데 집착함. 1914년 노동자가 ‘꾀를 부리는 것’을 줄이려는 생각으로 노동자의 가정생활을 관찰. 그러나 포드주의는 계획과 통제만으로 노동자를 부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공장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수준의 개인적 배려를 권고하게 됨. 더불어 노동자들에게 자사의 생산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돈을 더 주는 것을 함께 시행하게 됨.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대량소비는 2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를 반영. 노동자이자 동시에 소비자로서 이야기되면서 노동자들이 무엇에 만족하고 갈망하는지, 시장에서는 소비자를 유혹하기 위해 광고같은 새로운 산업의 탄생을 유발. 대량소비는 유토피아적 상상을 자유롭게 분출시켜 여러 장르에 영향을 끼치게 됐는데 특히 미래주의자들이 전폭적으로 받아드리게 됨. 그들은 자동차를 모더니티와 동일시했는데, 그것이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 이로써 포드주의는 하나의 역설을 생성했는데, 노동과 가정을 동시에 관리하고자 하는 시도로 시작됐지만 노동자들은 이제 주체성을 가지며 더 이상 생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게 됨. 그렇기에 포드주의는 강제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없었고 프로이트주의를 필요로 했다. 프로이트주의가 노동자들 내면의 갈망을 명확히 표현했기 때문. 여기서 그람시의 평가에 대해서 재고하는데, 포드주의를 찬양함과 동시에 대량소비, 자본주의가 그 자체의 해방적 잠재력은 틀어막았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프로이트주의의 의미가 놓여있다고 글에서 설명. 

 계속 포드주의와 프로이트주의가 어떤 역설에 처해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노동자 집단에서 개인으로 독립해나왔지만 개인은 흐릿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강화되는 주체성과 개인으로 인해 가정도 위기에 놓이게 되었으나 정신분석은 역설적이게도 재가족화의 빌미를 제공한다. 재가족화라 함은 가족으로 붙어있던 개인을 다시 새로운 관계적 규범에 합류하도록 일조한 것이다.

 그런 새로운 관계적 규범에 개인이 쉽사리 적응할 수가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주의는 ‘인간관계 전문가’와 ‘대중문화’들의 자기-규정에 긴요하게 작용하게 되는데, 이런 인간관계 관련 직종들은 그 기저에 2차 산업혁명의 통제경향이 있었다. 이제의 심리적 정리 기술은 부적합자들을 가려내고 치료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나 이제 ‘분석가’들은 자신들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그들이 선택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직업들은 개인들을 노동자가 아닌 새로운 관계적 규범에 합류하도록 이끈다.

대중문화는 통제를 동반하면서 그것을 벗어나려고 한다.(여전히 역설의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중) 대중문화는 인간관계 직종들에 비해 정신분석의 기여가 간접적이다. 대중문화는 개인을 끊임없이 원하는 존재로 묘사하며 역사가 아닌 자연과 싸우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 예로 광고를 드는데, 정신분석은 본격적으로 광고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광고는 공장의 관점에서 멀리 벗어나 소비자의 마음의 움직임에 점점 가까이 접근했다.’ 

 프로이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소비자 사회의 큰 중심이 되었던 영화산업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구시대적인 빅토리아주의에 항거하고자 일탈을 감행했던 주인공이 프로이트의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오는 식으로 이제 프로이트는 모더니티의 어떤 표상으로 읽힌다. 

 비단 캐릭터의 상징 뿐만 아니라 영화의 겉, 영화제작자들도 정신분석(학자)을 이용했다. 1924년 샘 골드윈은 프로이트가 영화에 참여해줄 것을 요구했고 그가 요구에 응하지 않더라도 미국으로 건너와 정신분석학을 ‘선전’하는 것을 도와준다고 제안했다. (프로이트는 응하지 않는 듯) 다음 해 골드윈은 다른 학자들에게 접근하여 정신분석 영화 제작에 도움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이들의 참여에 주의를 주었으나 그 영화에 참여한 정신분석학자들은 영상이라는 매체가 정신분석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한 것을 매개하는 것에 적합하다는 입장을 표하며 프로이트의 충고를 무시했다. 그렇게 탄생한 <영혼의 비밀>은 프로이트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정신분석학을 대중문화에 적용하는 것을 너무 보수적이지 않았는지 동료에게 피력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보수적이지 않았다며 다음 사례를 전개한다. 정신분석은 ‘새로운 고상한 야만인의 신화를 제공하며 1920년대 뿌리내린 문화의 대규모 민주화를 용이하게 해주었다 동시에 정신분석은 품위가 저하됐다.’ 프로이트는 미국에 다시 방문하지 않았지만, 미국은 정신분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프로이트주의가 포드주의적 문화의 신화 구조에 너무 깊이 스며든 까닭에 프로이트주의와 소비자주의는 손 쓸 도리없이 얽혀버렸다. [...] 프로이트주의는 미국화를 모더니티와 연결지었다. 그것은 유럽에서 발명되었으나 미국에서 변형되어 역수출된 많은 현상들 –사회과학, 분석철학, 피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프로이트주의가 미국 전반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포드주의-프로이트주의를 겪으며 문화전체에 퍼진 계몽주의적 자유주의(=주체)가 대중적 현상으로 바뀌었다고 여러 사례를 들며 설명한다. 새로운 사회운동, 즉 여성, 동성애자, 흑인 등이 등장하자 이것들과 정신분석의 관계는 중요해졌다. 특히 두 개의 장소에서 그 관계가 두드러지는데 하나는 가정이고 두 번째는 ‘원시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다. 이 맥락에서는 여성과 동성애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간다. 전후의 위축된 여성들은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아 개인적은 삶과 성적해방에 관심이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분석으로 촉발되긴 하였으나 여전히 정신분석과 여성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더 큰 범주로 나아가 ‘새로운 동성애자’들도 사로잡았는데, 여성과 마찬가지로 섹슈얼리티를 생식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직업으로서의 정신분석’은 그 자체로 양성적이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 진보적이긴 하나, 남성지배적이었던 정신분석계는 동성애자들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여성과 동성애자들은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이 새로운 신화와 갈등 관계에 머물러야 했다.’

 정신분석은 현대 문화의 개발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 중 미국의 대중문화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데 ‘국가사회주의에 의해 점화되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과 연결된 재사유 이전에 정신분석과 현대 문화 사이의 가장 폭넓은 교류는 뉴욕에서 일어났다.’ 프로이트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던 미국 연극계 사람들은 멜로드라마, 뮤지컬 코미디, 소극만 있던 미국 연극계에 비극을 도입했다. 특히 유진 오닐은 무대 전면을 의식에, 무대 뒷면은 무의식으로 비유했다. 또 흑인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트라우마, 폭력, 배반의 배경을 포함한 미국 문화의 무의식적 뿌리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힘을 실어주었다. 할렘 르네상스를 비롯한 문화실험은 대공황 이후에 중단되었지만 흑인 지식인들은 정신분석학 연구를 끝내지 않았다. 그 결과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문화 개념이 생겨났다. 

 예술적 모더니즘과 정신분석이 만나게 되었다. 이 만남이 가장 이견과 충돌이 많았는데, 모더니즘과 정신분석이 공통의 원천으로부터 나온 탓에 서로 할 얘기가 많았기 때문. 1980년대 아방가르드 운동의 공통 목표 “무의식적 감수성의 힘을 드러내기 위해 물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놀이라는, 죄의식 없는 무의식의 노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정신분석가들은 정체성의 원천으로 ‘원시적’인 것에 대한 지향을 공유했다. 폴 고갱, 카지미르 말레비치 등이 자신의 그림과 정신분석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 1920년대 ‘2차 모더니티’는 예술과 정신분석 사이의 공명을 심화. 다양한 작품들 곳곳에 무의식의 개념들이 언급되고 있다. 

 현대 예술과 정신분석은 사이놓게 지내고 있었으나 포드주의가 이것을 갈등관계로 몰아감. 예술가와 정신분석가 둘 다 자신을 스스로 창조한 존재로 간주하기를 좋아하는데,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설명해서 반발함. 그 후 사례들이 등장함. 그리고 세 가지의 개념이 로렌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에 등장하는데 이 소설에서 로렌스는 포드주의적 대량 생산의 충격을 묘사한다. 로렌스는 대량 생산이 “인물의 낡고 안정된 에고”에 기반을 둔 사실주의 소설을 진부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제 대망의 초현실주의자들에 대한 대목이 나오는데, 그들은 현대 문화를 구속되지 않은, 개인화된 욕망의 장으로 보는데, 인간적 대상과 비인간적 대상이 배치되는 르네상스 회화의 지각 공간을 무한히 상상적인 공간, 궁극적으로 욕망의 공간으로 대체한다. 더 나아가 초현실주의자는 모더니즘 예술을 비판하며 예술작품의 역할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미래주의~큐비즘~큐비즘~러시아 아방가르드 등의 예술운동들은 1920년대 박물관에 걸리게 되었고 무력화되었다. 이에 초현실주의자들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무의식적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감각을 창조하기를 원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많은 기법을 통해 그들의 관심사가 섹슈얼리티가 아닌 “무의식”이라는 점을 엿볼 수 있는데, 자동기술, 데페이즈망 같은 것들은 모두 무의식의 비이성이거나 초이성적 논리를 묘사하려는 시도들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정신분석을 개선해나가는데, 정신분석과 초현실주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프로이트에게 언어와 이미지는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은 언어와 이미지를 마술적 힘의 주문으로 보았다.” 프로이트는 꿈을 해석하려 했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은 그 자체로 두라고 프로이트를 비판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도 함몰과 주변성의 변증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예술을 행위와 일상생활의 체험에 결속시킴으로써 제도로서의 예술을 공격하면 할수록 그들은 대중문화, 광고, 영화에 점점 더 취약해져 이것들에 흡수되어 갔다. 대중문화에 초현실이 잡아먹히고 있다. 프로이트가 브르통과 달리를 만나기는 했으나 그들을 ‘알코올 도수로 치면 95도에 달하는 완전한 바보들’이라고 경멸했다. 

 이제까지 언급했던 모든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들에게 정신분석학의 빌미를 제공했던 포드주의의 진실을 파악했다. 정신분석학은 포드주의, 자본주의에 동원된 것이고 왜곡되어 있고 자신들을 배반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소망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정신분석에 매달렸던 것이었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적으로나마 분석이라는 직업에 그 아우라를 선사했고 그 실행에 영향을 끼쳤다. 

라고 하면서 제6장 포드주의, 프로이트주의 그리고 모더니티 장을 끝냄. 요약하자며 발제를 마치자면 전후의 미국 포드주의는 정신분석학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정신분석학의 상륙으로 미국 문화전반에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았다... 

 차별받고, 주체성, 개인 그리고 전후의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의식을 탐구할 수 있고 지금의 답답한 상황에 어떤 해답을 줄 것 같은 정신분석학을 어떻게 수용하지 않을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소름돋았던 부분은 초반 앞장에서 포드주의 경영자들이 노동자 집단을 해체하는 방법을 명확히 알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역설적이게도 노동자들이 주체성을 획득한다는 대목, 그리고 그 해체된 개인들을 광고, 영화라는 문화로서 다시 집단, 공동체로 소집하는 경험을 선사한다는 대목이다. 프로이트가 지속적으로 정신분석과 다른 장르가 결합하려는 시도를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우려를 표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아무래도 권위자라서 기민한걸까... 아니면 기민해서 권위자가 된 걸까... 

다음 장을 슬쩍 들쳐보니 본격적으로 주체, 계몽, 해방... 에 대해서 다룰 모양인 것 같다... 주체성 획득을 넘어 개인 안에 내제되어 밖으로 표출되는 저항이 되는 것에 정신분석은 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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