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쳉: 세계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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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누가 대신 선택을 강제해줬으면 한다.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해 메뉴를 고를 때 타인에게 나의 선택권을 양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무거나 좋아, 너 먹고 싶은 걸로 골라’. 알고리즘은 나의 취향을 파악하고 내가 볼 영상을 다음 순서로 밀어넣고, 자동으로 내가 다음으로 들을 노래를 추천하며, 넷플릭스에서는 내가 좋아할만한 영상을 자동으로 다운로드 해주어 언제든지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나의 모든 삶을 알고리즘, AI가 대신 선택해주면 어떨까? 위처럼 우리는 취향을 강요 당한다. 유튜브에서, 스포티파이에서, 넷플릭스에서, 우리는 주체성을 상실한다. 하지만 삶 자체에서 주체성을 양도하는 것은 어쩐지 거부감이 든다. 이미 주체성을 잃었다고 볼 수 있음에도.
‘어떤 세계는 하루만에 죽을 것이다. 어떤 세계는 당신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후략) 시대에 걸쳐 당신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복수의 세계.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산다, 살기 위해 세계를 건설한다.’
이안 쳉은 AI, 게임엔진을 통해 인간의 삶을 철학적으로 통찰하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번 세계연결의 서문에서는 의미심장하게도 세계를 주어로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크게는 인간의 주체성과 인간이 이룩한 제국과 국가에 대해서 반문하고 있다.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로 출발할 수 있는 이안 쳉의 연작시리즈 ‘사절’은 제국이 건설되기 전의 인간 행동을 상상한 작품이다. 이안 쳉은 독특하게도 어떤 내러티브를 스스로 부여하지 않는 듯하다. 여기서 인간으로 대표되는 게임캐릭터들은 어설픈 움직임으로 무엇을 생산하는 시늉을 한다. 배경을 구성하는 수풀, 불꽃, 나무, 깃발들은 멋대로 움직이며 스스로를 소멸하고 재생하고 있다. ‘무한한 길이’의 영상 속에서 인간은 허황된 동작을 수행하고 오로지 사물과 소통한다. 관람자는 무한한 반복을 행하는 영상 속에서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BOB 이후의 삶: 찰리스 연구>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이다. 지금 우리는 알고리즘에 사로 잡혀있다.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음악과 컨텐츠, 아이템을 소비한다. 알고리즘은 우리보다 우리의 취향을 더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어디를 클릭해야 할지를 지시한다. 소비가 정말 필요할 때는 알고리즘이 도움이 된다. 특정 제품군 중에서 내가 필요해 보이는 상품을 추천하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간적 효율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문제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까지 무한으로 추천한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스스로 소비를 결정할 권리를 알고리즘에게 빼앗긴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인간은 생산-소비-폐기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주체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임금을 위해 생산을 하고, 남은 여가 시간은 스마트폰 내의 알고리즘에 의해 소비를 하고, 타자에 의해 유행이 지난 물건, 권력층이 정한 잉여생산물들을 폐기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주체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애니메이션 내의 극단적인 내러티브는 우리가 과연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지, 우리의 정체성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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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쳉의 세계는 무한으로 굴러가는, 알 수 없는 시간의 연속들이다. 작품들은 제각기 다른 동작을 수행하고 있으며 이것은 노동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 불규칙들 속의 빈 특을 파고 들어, 인간과 세계 그리고 주체성,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전시였다. 우리가 알고리즘으로부터 벗어나 다시금 정체성을 찾고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을까? 이 편리한 세상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세계를 낯설게 볼 필요성을 느끼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