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른자에서 벨
이슬이 내려앉은 1인 텐트 안에서 눈을 떴다. 출입문 지퍼를 크게 열었을 때 주변을 휘감은 산들이 갓 뜬 해와 인사하고 있었다. 잠을 쫓아내듯 차가운 물에 씻고 곧 장 출발 준비를 했다. 며칠 동안 걸으며 그나마 시원한 아침에 걷는 편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밤 내내 오후의 따가운 해에 그을린 팔과 목, 이마 때문에 침낭 안에서 꿈틀거려야 했기 때문이다.
어제 하루종일 오르막을 올라 높은 마을에 온 만큼 시작부터 가파른 내리막이 시작됐다. 시원한 바다를 아래 두고 뾰족뾰족 솟은 바위 사이로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야 내려갈 수 있었다. 한동안은 가파른 내리막에 붙어 풀 뜯는 염소들 곁을 걸었고 또 한동안은 노부부가 데리고 온 복슬복슬 검은 털을 가진 강아지와 함께 걸었다. 내가 뒤쳐질 때면 이내 되돌아와 빨리 오라며 씰룩씰룩 엉덩이를 흔들었다. 오전 10시가 가까워질 때쯤 산길은 끝나고 정리된 들판 사이를 가로지르는 시골 도로가 나왔다. 그리고 때마침 눈부시게 내려앉는 햇빛이 초록 풀들 사이 핀 노란 꽃들을 금빛으로 빛나게 했다.
지난 글에서 리키안 웨이는 동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의 흔적들 사이로 걷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크고 작은 흔적들을 지나쳐 걸었지만 알른자에서 벨로 향하는 길에는 오스만 사람들의 저수조가 많았다. 술탄의 모자처럼 둥글게 솟은 저수조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왔다고 말하듯 때 묻은 모습으로 납작하게 앉아있었다. 조금씩 짙어지는 옛 도시들의 흔적이 내딛는 걸음을 더 설레게 했다.
크고 작은 밝은 색 자갈 위에 붉은색 흙을 칠한 앞사람들의 흔적들을 따라가다 보니 포장된 도로가 나왔다. 양 떼를 몰아 풀을 먹이는 할아버지께 힘차게 인사를 건네자 더 힘찬 인사가 돌아왔다. 도로 옆 낮은 주택 담벼락에는 연보라 빛 라벤더는 은은하게 향을 뿌리고 집집마다 걸려있는 붉은 튀르키예 국기가 "넌 지금 튀르키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해가 중천에 다다랐을 때 작은 가게를 들러 튀르키예 국기처럼 붉은 콜라를 한 캔 샀다. 시원하게 이슬 맺힌 콜라를 쭈욱 들이키고는 한 오분 숨을 돌렸다. 그리곤 언제나 그랬듯 다시 걸었다.
다시 시작된 오르막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오르막을 오르고 올라 드디어 벨에 도착했다. 메하고 우는 아기 염소를 만났고 조금 더 걸어 숙소를 찾았다. 아직 방을 청소 중이던 파트마 아주머니가 나를 보자 대문 앞으로 왔다.
"방 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트마 아주머니는 나를 안으로 끌고 가듯 안내했다. 손짓 몸짓으로 말하기를 얼굴이 너무 새빨갛게 익어서 곧 쓰러질 것 같다고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해가 더 뜨거워져서 힘들 거라고도 했다. 그리곤 시원하게 에어컨 틀어놓은 방에 배낭을 내려놓게 하곤 샤워하라며 수건을 주셨다.
한껏 달아오른 몸을 시원하게 식히고 나왔을 때 나는 너무 감동했다. 시원한 물과 금방 만든 괴즐레메가 있었고 아주머니는 배고플 테니 먹고 푹 쉬라고 했다. 계곡이 발 아래로 펼쳐진 낡은 테라스 식탁에 앉아 간소하지만 속을 꽉 채워주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배불러 반쯤 드러누운 채로 시원한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행? 바로 이 맛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