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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찬 Nov 29. 2021

창조와 키치

 과거는 언제나 아름답다. 왜 떠나간 것은 언제나 아름다운가? 자크 라캉의 말대로 인간은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세상과 마주한 순간 이후로 언제나 과거를 그리워하고 동경하도록 운명 지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2000년을 연상시키는 복고 이미지가 최근에 패션계를 즐겁게 해주고 있는 현상은 언제나 과거를 그리워 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 때문인걸까?

패션 창조자들의 관심사가 2000년대로 돌아가면서 대두되었던 하나의 문제는 과거의 패션 디자이너의 작품에 대한 이미지 차용 문제다. 오늘날 디자이너의 손에서 구현된 패션 이미지들은 분명 2000년대 초의 헬무트 랭, 알렉산더 맥퀸, 장 폴 고티에 등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하지만 과거로 눈길을 돌려 과거의 이미지를 빌려오는 태도 속에 창조성은 존재하는 것일까? 과거의 유산을 재현한 작품에 우리는 대체 어떤 창조성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곳엔 대체 어떤 새로움이 있다는 말인가? 패션과 유행이 그 존재의 이유를 언제나 새로움에서 찾는다고 할 때, 매튜 윌리엄스와 다니엘 리 등의 신세대 디자이너가 보여주고 있는 과거 디자이너의 이미지 차용은 과연 새롭다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오늘날 밀레니엄 세대는 분명히 이 도용된 레퍼런스의 조합에 열광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을 열광시킬만한 매력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과거를 대하는 오늘날 디자이너의 태도는 과연 창조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창조성은 오늘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가치로 전락한 것일까?


예술이 보여주는 창조성이 그 고귀함을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진정한 예술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간과 삶과 우주에 대해 진실하고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모두가 삶에 대한 이해의 증진이며, 인식 속에서의 휴식이다.
-조중걸,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시도이다. 게다가 그것은 관람자로 하여금 삶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통찰을 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의 고결함에 대한 정당성을 지닌다.


우리 삶을 조용히 응시해보자. 누가 감히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 인식은, 우리가 미망과 덧없음에 고통받는, 살기보다는 그저 존재할 따름인 무의미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진지한 예술은 우리 존재의 덧없음과 부조리함에서 도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그것을 바라보기를 원하며, 고통과 의연하게 맞선다.
-조중걸,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하지만 현대의 디자이너가 보여주는 과거 이미지의 차용은 어떤가? 우리는 그것을 보고 과연 디자이너가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들이 삶을 진실로 마주한 후에 탄생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과거 선조들의 천재성에 대해 한없이 감탄하며 디자이너 스스로가 오늘의 현실을 진지하게 마주하기를 포기하는 일은 아닌가? 이미 언급했듯이 과거가 되어버린 것들은 현재를 떠나 있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과거는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 그리움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속수무책이 되는가? 한 없는 그리움 앞에서 우리는 작품의 본질을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가? 당시에 슬픔과 공허함,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분노로 탄생한 작품들은 시간과 그리움 앞에서 피상적 아름다움만 남아버린 채 본래의 작품이 지녔던 가치와 목적은 잃어버리고 만다. 오늘날 그 작품들을 레퍼런스로 차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껍데기만 남아버린 그 피상적 아름다움을 차용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껍데기만 남아버린 아름다움에 대체 어떻게 삶에 대한 통찰을 기대할 수 있으며 무의미한 삶에 대한 슬픔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기만이며 키치다. 냉담하고 부조리한 세상 앞에서 소외당한 인간을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아름다운 이미지로 위로하는 척하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도록 만드는 키치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찬탄일 뿐일까? 과거가 되어버린 모든 것들은 단순히 과거에만 머물러 그 아름다움을 찬탄받기만 할 뿐일까? 우리는 시간을 칼로 자르듯 정확하게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 짓고 그렇게 구분 지어진 시간들끼리 아무런 영향도 주고받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알렉산더 맥퀸은 언제나 과거에만 머무르는 알렉산더 맥퀸인가? 과거에 존재했던 알렉산더 맥퀸은 오늘날 사유되는 알렉산더 맥퀸과 동일한가? 내가 바라보는 알렉산더 맥퀸과 타인이 바라보는 알렉산더 맥퀸은 동일한 알렉산더 맥퀸으로써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알렉산더 맥퀸은 과연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타인의 해석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수많은 알렉산더 맥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작품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항상 변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작품의 의미는 언제나 관찰자의 해석에 의해서 드러난다. 즉, 작품 자체는 고정된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존재도 작품도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현대의 디자이너가 차용하는 레퍼런스로서의 과거 작품들을 과거에 고정된 작품이 아닌 시간을 초월한 유기적 존재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거기서 창조성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 과거 이미지의 차용은 과거에 대한 단순한 찬탄이 아닌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된다. 과거에 대한 이해의 시도이며 과거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일이 된다. 그것은 본질을 잃어버린 채 가벼운 아름다움으로 변해버린 과거를 오늘날 다시 불러와 슬프고 덧없는 현실로 바꾸는 일이며 그것은 하나의 창조가 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하나의 창조 활동이 되려면 디자이너의 진지한 태도가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를 단순히 과거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지나가버린 시간에 퇴색된 과거의 의미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 그것이 과거를 다루는 현대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태도일 것이다. 그 진지한 대화의 과정 자체가 역사이자 창조의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과거에 대한 차용은 키치가 아닌 예술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2021.4.26





참고 자료

조중걸,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지식전람회(2007)


이미지 출처

Vogue.com

https://www.vogue.co.uk/fashion/article/helmut-lang-archive

https://www.instagram.com/forbiddenkn0wledge/

https://www.showstudio.com/news/bottega-veneta-launches-new-campaign-shot-tyrone-le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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