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새기는 타투도 이제는 낡은 것이 되어버린 걸까? 오늘날의 밀레니엄 세대는 타투를 몸에 직접 새기는 대신 입는다. 마린 세르의 초승달 모티프가 잔뜩 새겨진 ‘타투’ 보디수트는 밀레니엄 세대에게 얼마나 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가? 초승달 타투로 엮어진 하나의 쿨한 패션 부족! 이들은 왜 타투를 ‘입기’ 시작했을까?
우리는 왜 타투에 열광하는가? 타투의 기원과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아직 타투가 패션화 되고 상품화되지 않은, 즉 유행의 체계 바깥에 존재하는 비서구 문화권에서의 타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니퍼 크레이크는 그의 저서 <패션의 얼굴>에서 뉴기니아 고지에 사는 하겐족의 자기 장식의 사례를 통해 원시적인 형태의 타투를 설명했다. 하겐족의 타투, 화장, 장신구 등과 같은 신체 장식은 특히 남성 무용수 사이에서 돋보이는데, 그들의
장식은 유난히 공을 들였고, 힘들게 조립되었으며, 화려하게 채색되었고, 인상적이어서 춤 의식의 중심이 된다. 대체로 장식에 사용된 품목 중 많은 것들은 상거래 시 사용되는 재물이기도 하며 그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부에 대한 이러한 착상을 표현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장식에 사용된 부속품들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그것은 단지 장식일 따름이다’라는 무의미한 말에만 부딪쳤다. (A. Strathern 인용, 제니퍼 크레이크, <패션의 얼굴>)
즉, 타투는 자신의 신체를 꾸미고 싶어 하는 인류의 본질적인 욕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점은 중요한데, 신체를 관리하고 치장하는 일이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출현한 것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욕망(desire)은 동물적 생존 차원의 욕구(need)와는 달리 사회적, 문화적 차원의 개념이다. 즉, 욕구가 본능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욕망은 의식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따라서 욕망은 언제나 의식을 형성하는 사회의 구조에 의해 발생한다. 그렇다면 욕망과 관련된 모든 행위는 사회적 차원, 즉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 해석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타투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만약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타투는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 문신을 하는 것이다.
신체에 문신을 새기는 행위는 옷을 입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용모를 분명히 하고 사회 속에서 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한다(제니퍼 크레이크). 즉, 신체 장식의 방법 중 하나인 타투는 사회적 자아를 창출하기 위한 테크닉인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사회적 자아는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수많은 타자와 연결되어 있는 사회 속에서 나의 제 2의 얼굴이 된다. 타인은 새롭게 창출된 제 2의 얼굴을 통해 한 개인의 정체성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으며, 그들의 새로운 얼굴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사회에 융화될 수 있다. 과거 부족 사회에서 종족 자체의 정체성이나 공동체 내의 사회적 계급 등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타투가 이용되었던 이유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타투가 규정한 이 사회적 자아는 언제나 한계점을 가진다. 타투는 하나의 자아를 언제나 사회적 차원에서 규정할 뿐 사회적 관계 바깥의 개인의 정체성까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적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개인의 가지는 특별한 개성을 지워버린다. 따라서 사회적 자아를 만드는 도구로써의 타투는 그 기능상 언제나 주체와 신체 간의 개인적이고 자연적인 관계를 무시할 수밖에 없다. 타투가 새겨진 신체는 사회적 정체성과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자아는 지워져 버린 자연 그대로의 정체성에 대한 상실감으로 언제나 불안감을 느낀다. 우리는 그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시도로써 타투를 계속해서 새롭게 새기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새김으로써 지워져버린 진짜 정체성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하지만 타투를 더욱 강하게 새긴들 온전한 의미에서의 자아를 표현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딜레마에 빠졌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를 벗어나서는(즉, 타투를 새기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고, 타투가 새겨진 이상 영원히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그저 이대로 무기력하게 개인의 진정한 정체성을 잊어버린채 살 수밖에 없을까? 다행히도 미래가 그렇게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타투가 새겨진 존재는 사회적 정체성 아래 본래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긴 했지만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먼지에 쌓인 채, 누군가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만약 우리가 잊혀진 자아의 간곡한 요청에 귀 귀울이는 시도를 한다면, 순수한 정체성의 부활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마저도 타투의 형태로 표현될 것이고 그렇기에 완벽하게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상 언제나 타인이 확인할 수 있는 사회적 얼굴로 우리의 정체성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자아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새롭게 표현된 타투는 과거에 비해서 조금 더 진실한 모습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형태일 것이며 그것은 우리를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과거의 것을 몰락시키고 새롭게 출현하는 어떤 것이다. 진리는 이데아도, 의미도, 형상도 아니다! 진리는 동사적인 것이다. 언제나 권력을 새롭게 생성하기 그리고 그 생성의 반복이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쟈크 라캉, 백상현, <라캉의 정신분석과 여성적 욕망의 윤리학>
이 새롭게 출현한 타투들 중 하나가 바로 마린 세르가 보여주는 초승달 모양의 타투가 아닐까? 새로운 타투를 통해 밀레니엄 세대를 하나의 부족으로 묶어 놓은 프랑스 디자이너 마린 세르의 패션 미학은 잊혀져버린 진실한 자아 정체성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유행 체계 안에서 현대인들은 얼마나 억압당하고 있는가? 특히 현대 여성들은 유행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사회적 자아)에 부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타투를 새겼으며, 얼마나 많은 옷을 소비해야만 했던가? 게다가 스스로를 이상적이라고 정의하는 유행의 여성상들은 대체 누가 정한 것인가? 그것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여성들을 어우를 수 있는 것이었나? 오히려 유행이라는 사회적 문화적 정당성 아래 모든 여성을 더욱 ‘여성스럽게’ 만들면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던가? 이런 억압적인 패션 시스템을 마린 세르는 과감하게 거부한다. 그녀는 특히 보수적인 패션계가 주장해 왔던 허구적 패션 판타지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고 기존의 완벽하고 절대적인 미의 기준을 탈피해 전인류를 어우를 수 있는 새로운 디자인 미학을 제시한다.
“패션은 언제나 꿈에 대한 이야기였죠, 저는 그걸 좋아하지 않아요. 패션은 가장 마지막에 보는 것이에요.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사람 그 자체죠. ” -마린 세르 (출처 : https://www.vogue.com/fashion-shows/fall-2021-ready-to-wear/marine-serre)
시각적인 아름다움에만 치중한 나머지 의상 착용자의 신체의 움직임을 제한하던 반-인류적인 의상에서 탈피해 실용적이고 신체-친화적인 아이템들을 보여주는 등 마린 세르가 보여주는 행보는 과감함을 넘어 과격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린 세르 디자인 미학에서 가장 큰 의의는 신체를 꾸미는 행위의 주체 자체를 사회적 요구로부터 개인 자신으로 되돌려 놓았다는 점에 있다. 그녀의 의상은 인간의 신체 자체의 요구와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지 사회가 규정해놓은 여성성과 같은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질서 없이 연결된 조각 드레스, 세상에 단 한 벌만 존재하는 피스(대량 생산에 대한 안티-테제), 소비의 사회에 의해 강요되고 있는 속도감에 대한 반발(업사이클링, 더 만들지 않기…, 패션쇼와 매스 광고로부터 탈피하기), 자연의 색상 등은 분명 이전의 사회적 문신이 갈라놓았던 의복과 개인의 신체의 관계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이제껏 공동체의 정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억압당했던 개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의 해방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자크 라캉의 말대로 진리란 언제나 과거의 것을 몰락시키고 새롭게 출현하는 어떤 것이라면 기존의 억압된 질서로부터 과감하게 탈피하고자 시도하는 마린 세르의 타투 패션이야말로 현대인들을 진리의 방향으로 이끌어줄 밀레니엄 시대의 혁명적 도구가 아닐까?
참고 자료
https://www.vogue.com/fashion-shows/fall-2021-ready-to-wear/marine-serre
제니퍼 크레이크(지은이), 정인희,함연자,정수진,김경원(옮긴이), 『패션의 얼굴』, 푸른솔(2001)
백상현, 『라캉의 정신분석과 여성적 욕망의 윤리학』, Lacan collage of Korea(2019)
이미지 출처
Vogue.com
Ywywmagaz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