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소비의 신화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의 추천에 의해 영상을 소비하고, 쇼핑하고 친구도 사귄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지만 그 존재가 우리 일상 속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우리는 그것의 등장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이 현대 문화의 핵심이 된 오늘날 우리가 보고 듣고 상호작용하는 것의 중심에는 항상 인공지능이 존재하고 있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바로 이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은 이제껏 우리가 추구해오던 욕망의 산물이며 그것의 영향력은 막강해져 이제는 이 욕망의 산물이 우리의 무의식을 생산하고 인류의 문화를 구축한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은 오늘날의 우리를 생산하고 있다!
패션계 또한 인공지능의 영향 아래서 자유롭지 못하다. 패션 영역에서 인공지능은 쇼핑 체험, 비주얼 광고 영상을 넘어 이제는 디자인 영역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아크네 스튜디오의 2020년 가을 남성복 컬렉션이 인공지능의 디자인 가능성을 입증했다.
아크네 스튜디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니 요한슨(Jonny Johansson)은 아티스트 로비 배랫(Robbie Barrat)이 고안해낸 인공지능과 협업하여 컬렉션을 완성했다. 아크네 스튜디오 아카이브 속 수천 벌의 착장을 배랫의 소프트웨어에 입력하면 인공지능의 신경망은 입력된 이미지를 분석해 반복되는 일련의 패턴들을 찾는데, 그 패턴에 따라 렌더링 된 이미지를 기반으로 아크네 스튜디오 디자인팀은 컬렉션의 최종 디자인을 완성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아크네 스튜디오의 브랜드 이미지는 그대로 가져가면서 인공지능만의 새로운 시각이 더해져 사람이 디자인한 것만큼이나 창의적인 컬렉션이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디자이너가 아닌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에 의해 패션이 창조되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인가?
기계의 디자인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그 정의를 명확히 해야 한다. 패션 디자인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의 창조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그 아름다움을 조건 짓는가?
패션은 어디까지나 상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으로써의 미덕을 잘 갖춘 패션이 아름다운 패션일 것이다. 결국 가장 많이 소비되는 패션이 가장 아름다운 패션인 셈이다. 게다가 이 소비는 패션을 넘어 오늘날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규정짓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관계를 소비를 통해 하지 않는가? 따라서 소비의 미덕을 갖춘 아름다운 패션이 되기 위해서 패션은 우리에게 소비를 부추기고 우리를 소비의 신화에 더욱 결속시키고 소비의 시스템 안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되는 것이다.
소비의 신화는 유행이라고 하는 독자적이고 허구적인 시스템이며, 새로움과 낡음이라고 하는 언어로 표현될 것이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 낡음을 위한 낡음. 새로움을 위해서라면 낡음도 새로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세련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창의성’은 이 허구적인 시스템을 포장하기에 아주 적당한 것이었다. 결국 우리가 이제껏 믿어왔던 창의성이라고 하는 것은 완벽하게 잘 짜인 '소비의 신화'라는 체계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즉, 소비의 신화는 곧 유행이자 창의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새롭게 다시 해야 한다. 기계는 디자인할 수 있는지가 아닌 기계는 소비의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계는 소비의 신화를 유지시킬 수 있는가? 과연 기계가 만들어낸 신화는 사람의 그것보다 더 환상적일 수 있을까? 를 물어야 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패션이 상품으로써 존재하는 이상, 즉 유행의 시스템 속에 종속된 이상 패션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창의성은 표현할 수 없다. 패션의 창의성은 패션계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특정 이미지를 제시하는 패션(하나의 패션 브랜드 혹은 디자이너)은 다른 패션 이미지들과의 차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뎀나 즈바잘리아의 발렌시아가가 소비자들에게 새롭게 인식될 수 있었던 이유는 디올과 생 로랑의 부르주아적 패션이 앞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뎀나의 의 반-부르주아적인 스트리트 패션은 부르주아 패션과의 차이일 뿐이다. 발렌시아가의 정체성은 다른 브랜드의 정체성이 규정짓는다. 기존의 존재와의 차이로써의 정체성 탄생은 그 자체로 유행이 되고 이 유행은 패션 체제를 무한히 지속시켜준다. 새롭게 제시된 디자인이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고 제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하더라도 기존의 패션을 낡은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치 없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존재들과의 단순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에 창의성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개성과 자유의 표현이라고 믿고 있는 패션은 새로움이라는 환상 지속시키기에 다름 아니다(창의성이라는 환상 만들기 게임). 그리고 만약 패션이 창의성이라는 환상 만들기 게임이라고 한다면 인공지능은 이 게임에서 인간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과거에 존재하던 브랜드와는 차이점을 분석해 과거와는 다른 이미지를 제안하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인공지능이 데이터 수집과 수치의 파악에 있어서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패션이 단지 수치에 대한 이야기라면 창조성의 게임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할 수 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패션은 단지 수치에 대한 이야기인가? 패션의 영역에 있어 수치화되는 것은 무엇인가? 가령 음악에서의 예를 들어보자.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보통 인간의 감정을 연결시킨다. 즉, 음악의 존재 가치는 인간의 감정에 의해 규정된다고도 볼 수 있다. 만약 음악과 인간의 감정 간의 관계를 수치화할 수 있다면 인공지능은 이 수치를 분석해 인간이 창조하는 음악보다 더 정확히 인간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달 덕분에 인간의 감정을 화학적 결과물로써 뇌파의 측정을 통해 수치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특정 스타일의 음악과 감정에 따른 뇌파의 변화를 측정해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패션은 감정보다는 욕망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샤넬 트위드 재킷은 왜 이토록 매력적인가? 그 매력은 우리가 샤넬 슈트에 대해 느끼는 기쁨에서도 오겠지만 그것보다 샤넬이라는 브랜드가 지닌 이미지, 그것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오지 않는가? 기쁨과 욕망은 무엇이 다를까? 욕망은 슬픔과 기쁨이라고 하는 감정의 영역이 아닌 정체성 규정의 영역에 속하는 무엇인 것 같다. 즉, 샤넬이 이야기하는 이미지의 정체성. 고상함이라고 하는 정체성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규정된 정체성은 실재의 것이 아닌 허상의 존재이다. 즐거움과 같은 감정은 실재하는 것이지만 욕망은 비-실재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즉 욕망은 감정과 성격이 다른 것으로 규정된다. 결국 우리는 허구적인 무엇을 얻기 위해 패션을 소비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허구성을 바탕으로 하는 욕망을 실재적으로 수치화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욕망은 감정과 그 어떤 관계도 없는 것일까? 만약 욕망이 감정으로부터 온다면 우리는 그 감정을 분석하고 감정과 디자인 간의 상관관계를 수치화하여 인간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디자인만 뽑아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욕망은 감정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영역에 속한다(욕망은 허구 속에 감정은 실재 속에 존재한다). 어쩌면 욕망은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허구적인 감정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패션은 실재의 세계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게임 체계이다. 그 게임 체계 안에서 패션은 다양한 가상의 아바타들을 만들어 내고 우리에게 그 아바타를 선택해 각자의 정체성을 규정해 보라고 지시한다. 그렇게 가상 세계에서 규정한 나의 정체성은 진실한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정체성으로부터 느끼는 만족감, 그 기쁨의 감정은 실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홀로그램처럼 존재하는 가상일 뿐이다. 실재하는 감정처럼 느껴지지만 절대 닿을 수 없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만질 수 없는 가상일 뿐이다! 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감정은 측정됨과 동시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막 속 신기루와도 같다. 측정되기 바로 직전의 순간까지만 존재하는 그 욕망을 인공지능이 아무리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듯 상상하고 그 상상의 세계 속에서 게임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의 허구적 감정들은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그 허구적 감정들을 탄생시키는 게임 체계는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인공지능이 만들어 내는 게임 체계가, 그 체계가 만들어내는 패션 정체성이 하나의 유행 시스템이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인공지능이 만드는 패션 체계는 인공지능 그 자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들의 의도 하에 형성될 것이다. 즉 인공지능은 엘리트들의 패션 신화 만들기에 기여를 하는 것이 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만약 그렇게 되면 패션 문화는 이전보다 더욱 엘리트화 될 것이며, 일반인들과 신화 메이커(엘리트)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과 손을 잡은 신화 메이커들은 더욱 완벽한 신화, 더욱 완벽한 허구의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허구의 세계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환상과 진실을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할 것이며, 그런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과연 인공지능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더 나아가 언젠가는 실재적인 인간 존재가 막강해진 창의성이라고 하는 환상의 잣대에 의해 실재 세계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서야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이미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참고 자료
https://xrgoespop.com/home/acne-studios-x-robbie-barrat
https://www.itsnicethat.com/features/ones-to-watch-2020-robbie-barrat-digital-240220
김재인,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동아시아(2017)
에이미 웹(지은이), 채인택(옮긴이), 『빅 나인』, 토트(2019)
이미지 출처
Joelle Diderich (Instagram @jdideri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