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마이클 샌델 著. 정의란 무엇인가. 2014. 미래엔
제 책장에는 재작년에 사서, 인용을 위해 몇 군데만 발췌독하고 방치해 온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입니다. 학벌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는 능력주의 사회에 대한 샌델의 견해를 한 줄 인용한 뒤, 통독은 미뤄둔 지도 벌써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곧 읽겠지라며 책장에 꽂아놓은 책들이 몇 권 더 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만 다 읽고 나면 바로 읽어야지 마음먹었다가도, 금방 또 다른 책에 눈길을 주느라, 좀처럼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소설가 김영하가 말했다는, ‘책이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사놓은 것 중에 읽는 것’이란 말이 고까운 것도 이런 제 현실 때문이겠지요.
이번에야말로 ‘읽고 치운다’는 다짐으로, 우선 샌델의 전작인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습니다만, 그 사이에 또 세 권의 책이 쌓이고 말았습니다. 1주일 전의 결심은 또다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이 책은 한국에서만 200만 부가 팔린 슈퍼 베스트셀러입니다. 2009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후, 2010년에는 김영사에서 출판되었고, 2014년부터는 미래엔의 성인출판물 브랜드인 와이즈베리에서 출간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의 놀랄 만한 성공에 대한 평가는 혐오 가득한 시선에서부터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는 분석까지 꽤나 다양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동네 도서관에 있는 단 한 권의 책은 2010년도 판본인 김영사의 것이었는데요, 거의 누더기 수준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두 권의 원서도 동네 도서관에는 갖춰져 있던 터라, 그냥 원서로 읽어볼 작정으로 빌려왔습니다.
누구나 다 읽는 베스트셀러를 읽는 건 모양 빠진다며 굳이 읽지 않았던, 중2병 그 자체인 스노비즘의 영향은 이 책에도 미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읽는다면 ‘모양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뭔가 다른 형태의 독서가 필요했는데요, 원서 읽기라는 꼴값이 좋은 대안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대충 300페이지도 되지 않는 분량에 10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니, 조금 분량이 많은 챕터를 이틀에 걸쳐서 읽는다고 해도 2주면 다 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기롭게 도서관 서가에서 원서를 빼들고 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1 챕터를 다 읽고 나니 3시간이 좀 넘게 걸렸더군요. 3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글을 읽는 사이, 저는 ‘시간과 정신의 방’에 다녀온 모양입니다. 헛웃음이 나오더군요. 시간효율이 극악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책 읽는 속도가 그리 빠른 편이 아닌데요, 영문은 더 심하구나 싶어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보통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을 읽을 때는 원문을 PDF파일로 다운로드하여 함께 살펴보곤 합니다.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영문은 큰 오역 없이 이해하는 편입니다만, 그 이외의 언어들은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영어만큼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구글 번역의 도움을 받으면 라틴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원문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건 원문으로 뭐라고 표현했을까”란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이런 식으로 곧잘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저작권이 만료되지 않은 현대의 책들을 읽을 때입니다. 고전이야 저작권이 만료되었으니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나 여타 작업들을 통해 PDF 파일을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신간서적들은 영문 이북이라도 구매하지 않는다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간간히 대역해 보며 궁금증을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책도 보통의 번역 고전을 읽을 때와 같은 방식을 취해보자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원서를 빌려온 그날, 동네 도서관에서 미래엔의 번역서 대출을 신청했습니다. 제가 사는 서울 관악구의 동네 도서관 시스템을 꽤나 잘 구축된 편이라서, 중앙도서관 이외에도 각 지역의 거점도서관은 물론이요 작은도서관까지 통합시스템을 구축해서 상호대차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심지어 대출 도서 수령은 지하철역에서도 가능합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중앙도서관 서가에 놓여 있던 김영사판 누더기 대신,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관내 다른 도서관의 미래엔판을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이 한국에 출간된 이후, 정말 많은 비판들이 쏟아졌습니다. 비판 칼럼은 넘쳐나고, 심지어 비판 서적도 ‘되게’ 많습니다. 이 따위 똥글이나 싸지르면서 어떻게 비판을 하겠냐 싶은 쓰레기도 있었지만, 박정순의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무엇이 문제인가』(철학과현실사. 2016.)와 같이 뛰어난 저작도 있었습니다. 저는 초반 트롤리 실험에 대한 기술에서부터 고개를 갸웃거렸더랬습니다. 필리파 풋을 시작으로, 다양하게 변주된 트롤리 실험에는 근본적으로 이중효과(double effect)라는 도덕적 딜레마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샌델은 그 딜레마를 가볍게 무시하고 논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심각한 결함을 노출하고 맙니다. 이에 대해 박정순은 정말 ‘각 잡고’ 빈틈을 메우는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목차만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위화감과 불만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와중에 신드롬에 대한 날 선 비판 중에서는 박정순이 “가장 최악의 시각”이라고 본 박홍규의 칼럼에 고개를 끄덕여 보게 됩니다.
하버드대학 교수가 쓴 책이라는 이유로 순식간에 30만 부나 대량 판매된다면 이는 ‘하버드’란 이름의 명품 상업의 획일주의가 낳은 블랙코미디의 하나에 불과하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해도 그렇다. 이와 달리 일각에서 유행하는 문화의 폐쇄적 순수성이 아니라 개방적 잡종성을 아무리 인정한다고 해도 문화의 획일적 편향은 국수주의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수백 년의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데도, 그런 사대적 역사를 비판하고 획일적 식민성을 극복하려 하진 않고 아직도 최소한의 주체성이나 다양성조차 갖지 못한 유치한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희한한 블랙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인가.
- 박홍규. <획일주의가 낳은 블랙코미디>. 경향신문. 2010년 8월 25일. https://www.khan.co.kr/article/201008252143425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아주 몹쓸 책이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사례를 적절히 나열하면서 도덕철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기회를 갖게 만들면서, 나아가 가치론적 차원의 정치철학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중섭의 평가에 동의하게 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대학생을 상대로 한 강의이기 때문에 서양철학, 특히 윤리학의 중요한 사상가들을 교과서적인 지식으로 잘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샌델이 자신의 철학과 무관하게 중립적으로 서양윤리학사를 전달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자신의 정치철학적인 입장을 부각시키고 학생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고도로 기획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샌델의 논리를 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정치철학에 동조하게 된다.
- 신중섭.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바로읽기. 비봉출판사. 2016.
박홍규의 조롱과는 달리, 일본에서도 이 책의 인기를 하늘을 찔렀습니다. 우리나라만큼은 아니었지만, 일본에서도 누적 판매량이 100만 부를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고바야시 마사야(小林正彌)와 같은 일본 학자도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황금물고기. 2012.)을 통해 분석했습니다. 고바야시는 하버드대학이라는 지적 브랜드, 대중사회 속의 지적 오아시스, 대화형 강의의 신선함, 강의의 연극적인 전개, 사례나 도덕적 딜레마의 흡인력, 정치철학이라는 장르의 매력, 세계의 시대상황과 매치되는 시의성, 동아시아의 문화적 전통과 공감이라는 이유에서 그의 강의가 이런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고 봤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분석입니다.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당신도 눈치챘겠지만, 나는 이 방식을 선호한다. - 379쪽
샌델의 정의론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사람들의 정리가 있으니, 비전문가가 나서서 보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저 이 책에서 샌델이 노골적으로 드러낸 견해만 옮겨 적는 것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몇 가지 가능한 주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라고 덧붙였습니다.
1. Citizenship, sacrifice, and service
Traditionally, the public school has been a site of civic education. In some generations, the military has been another. I’m refrring not mainly to the explicit teaching of civic virtue, but to the practical, often inadvertent civic education that takes place when young people from different economic class, religius backgrounds, and ethnic communities com together in common institutions.
2. The moral limits of markets
Since marketing social practices may corrupt or degrade the norms that define them, we need to ask what non-market norms we want to protect from market intrusion. This is a question that requires public debate about competing comceptions of the right way of valuing goods. Markets ar useful instruments for organizing productive activity. But unless we want to let the market rewrite the norms that govern social instituions, we need a public debate about the moral limits of markets.
3. Inequality, solidarity, and civic virtue
If the erosion of the public realm is the problem, what is the solution? A politics of the common good would takes one of its primary goals the reconstruction of the infrastructure of civic life. Rather than focus on redistribution for the sake of broadening access to private consumption, it would tax the affluent to rebuild public institutions and services so that rich and poor alike would want to take advantage of them.
4. A politics of moral engagement
A more robust public engagement with our moral disagreements could provide a stronger, not a weaker, basis for mutual respect. Rather than avoid the moral and religious convictions that our fellow citizens bring to public life, we should attend to them more directly-sometiems by challeging and contesting them, sometimes by listning to and learning from them. There is no guarantee that public delibertaion about hard moral questions will lead in any given situation to agreement-or even to appreciation for the moral and religious views of others. It’s always possilbe that learing more about a moral or religious doctrine will lead us to like it less. But we cannot know until we 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