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를 읽는 이유 중에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밴드웨건을 집어 타는 스노비즘이라고 합니다. ‘나도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은 그 책을 읽지 않은 이들과 차별을 이루어내며, 그 차별은 지적 우월감을 맛볼 수 있는 ‘읽은 사람’이라는 지위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물론 베스트셀러 역시 ‘책’이라는 상품이기 때문에, 그걸 구매하는 것만으로도 ‘언젠가는 읽을 것’이란 독서가능성을 읽은 것과 다름없다는 착각으로 몰고 가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일부 발췌독만 하고 책장에 꽂아둔 책을 완독 했다고 착각한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스노브는 ‘개나 소나 다 읽는 베스트셀러 따위는 읽지 않는다’는 변종 스노비즘에 쉽게 빠지곤 합니다. “아, 그 책을 아직 안 읽어봤구나?”라며 잘난 척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다들 읽었다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개나 소’가 되지 않으려고 그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객기를 부려봅니다.
나이를 먹다 보니, 이런 말 같잖은 스노비즘이 부끄러워집니다. 남들이 그렇게까지 많이 읽는 데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많이 팔리는 상품은 그저 품질이 가장 좋아서가 아니라, ‘적절’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가성비가 됐건 뭐가 됐건 말입니다. 따라서 베스트셀러를 백안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흥미가 없다면 굳이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겠지만, 흥미가 생긴다면 안 읽겠다고 버틸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지금까지 중2병스러운 이유로 멀리해 왔던 이 책을 이제야 펼쳐든 이유입니다. 불혹을 훌쩍 지나 지천명에 가까워져서도 완치되지 않는 걸 보면, 중2병은 불치병인가 봅니다.
2. 과유불급
이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각종 논문의 개요에서 필요한 부분만 가져다 모자이크 한 역사학의 키메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빅 히스토리’로 접근하다 보니, 사실 검증에 필요한 미시적 담론들은 제거되고 지나친 단순화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외형적 유사성에 기반한 과장된 일반화의 견해들을 마치 확정된 사실인양 논거로 삼아 비현실적인 주장을 일삼습니다. 이러니 숱한 학자들에게 욕을 먹었나 봅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재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뒤집어 놓습니다. 이런 전복적 시도는 언제나 독자의 시선을 끕니다. 게다가 그 전복에 제법 그럴듯한 이유들도 가져옵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 논거들은 하나같이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과장된 일반화에 근거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인지심리학적으로 꽤나 멍청한 짓을 잘합니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하고 좀 더 많은 사실을 확인하기보다는 그냥 혹하고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인지심리학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다루는 앤드류 슈툴먼과 대니얼 사이먼스/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쓴 두 권의 책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인간은 보통 “이게 맞아?”라며 책장을 덮고 그와 관련된 논문이나 학술서를 찾아보기보다는, “어머, 그래?”라며 일단 저자의 견해에 동조하며 계속해서 책을 읽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재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책을 조지프 헨릭의 책을 읽고 나서, ‘아무래도 이 책을 염두에 두고 제목을 창조해 낸 듯하다’는 의심으로 찾아 읽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그 의심이 맞는 듯합니다. 조지프 헨릭의 풍부한 실증들이 유발 하라리의 엉성한 주장들에 대충 수긍하며 독서를 이어 나아가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인지혁명과 농업혁명 부분에서 보이는 엄청난 구멍들을 조지프 헨릭의 책이 잘 메꾸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꾸어지지 않는 구멍도 참 많았는데요, 특히나 “농업혁명은 덫”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이란 확신이 그랬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두뇌 구조가 바꾸면서 집단을 이룰 수 있게 됐고, 그 집단은 계급을 만들고, 그 계급은 노동력 착취로 이어지면서 그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큰 집단의 인구를 정착지에 가두어 둘 수 있는 수단으로 경작을 하게 됐다는 게 하라리의 주장입니다. 얼핏 보면 혁명적인 견해인데요, 이에 대한 구체적 실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괴베클리 테페의 예를 들고 있긴 하지만 취약하기 그지없는 주장입니다. 재미있는 주장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습니다. 조지프 헨릭의 풍성한 인류학적 민족지학적 실증에서도 빠져 있는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라리의 잔재주는 선사시대나 고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제법 재미있었습니다만, 다양한 저서들이 지금까지도 풍부하게 전달되고 있는 근대에 이르러서는 아주 몹쓸 헛소리로 보였습니다. “종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이데올로기라고 칭한다”는 과장된 일반화에는 짜증이 솟고, “인본주의적 종교들”이라며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체계들을 싸잡는 걸 보면 질리게 됩니다. 에드먼드 포셋이나 헬레나 로젠블랫의 책을 읽어 본 뒤라면, 근대 정치철학은 꽤나 정교하게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에 역행해서, 철학을 ‘종교’라 조롱하는 걸 보자니 도대체 이런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반발심마저 생깁니다. 그 결과 <16장 자본주의 교리> 이후로는 이렇다 하게 눈길이 가는 기술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561쪽에서 프랑스혁명이 프랑스인의 행복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는 개소리가 눈에 띄긴 했습니다만, 이마저도 <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는 제국주의자다>란 제목의 한국일보의 기사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500쪽쯤 읽었을 때 넘치는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도대체 이 책이 어쩌다 베스트셀러가 됐나“ 싶어 검색하다가 찾은 기사였습니다.
리뷰를 쓰다 보니 공산당선언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all that is holy is profaned, and man is at last compelled to face with sober senses, his real conditions of life, and his relations with his kind.
인간이 지적 예속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명하다며 공고히 뿌리를 내린 것들을 혁파하고 성역화한 것들을 해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맨 정신으로 진짜‘를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진리로 여겼던 ’딱딱한 것‘들이나 ’신성한 것‘들에 의문을 제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질 않고 그저 곧이곧대로 믿다 보니 ”당신이 속는 이유“가 되곤 합니다. 그런데 그 의심도 정도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진실에 무턱대고 의심하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이 책이 그렇습니다. 안 해도 되고, 심지어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의심까지 차고 넘칩니다. 과유불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