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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철 Jul 12. 2024

우연히 만난 책도 결국 필연적 선택이다.

[북리뷰] 무라야마 지준. 조선의 귀신. 민속원. 2019

1. 우연한 만남, 필연적 선택


 이 책을 펼쳐 들 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6월 26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인스타그램에 다음과 같은 피드가 올라왔습니다.  

 일단 강렬한 제목만 보면 이게 무슨 엉터리인가 싶습니다만, 출판사가 민음사였습니다. 민음사라면 허투루 책을 내는 곳은 아니란 믿음이 있으니, 적어도 학술서적 언저리에는 갈 것이란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여기에 지은이가 무라야마 지준이란 일본인입니다. 일본인이 ‘한국’의 귀신이 아니라 ‘조선’의 귀신을 다루었다는 점에 천착한다면 일제강점기 민속학자의 초기 작업이겠거니 싶어집니다. 초기 작업들은 크게 두 가지 특색을 보여주곤 합니다. 첫째는 무식하리만큼 충실한 자료조사를 보여주곤 합니다. 할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둘째는 ‘실용적 목적’에 복무하기 위해 학술적 객관성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 보니 후자의 위험성 때문에 학문 초기의 저작들은 조심스레 골라 읽어야 낭패가 덜합니다만, 전자의 이유도 있다 보니 일단 찾아서 펼쳐본다고 해도 손해 볼 일은 아니겠다 싶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전자의 뛰어남은 부족했지만 후자의 위험은 적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책에 한해서는 말입니다.


 머리말과 역자 서문을 읽고, 목차를 살펴본 다음, 책장을 휘리릭 넘겨봤습니다. 이 정도면 일단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게으름이 지나쳐서 여직 시작도 못하고 있었던 신화와 기담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는 첫걸음을 떼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덕분에 이 공부를 위해서는 한국십진분류의 어떤 항목에서 책들을 찾아봐야 하는지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만난 책이지만, 빈약한 동네도서관의 서가를 훑어본 이후에는 올해가 끝나기 전엔 기필코 읽었을 책이었구나 생각해 봅니다.



2.‘엉터리 종교학자’의 ‘엉터리 아닌 자료’


 동경제국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은 조선총독부 관방문서과 촉탁직으로 1924년부터 41년까지 총독부에서 진행하는 조사사업에 종사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조사작업에 경찰을 동원하기도 해서 경찰서장 경력이 있다는 소문도 있지만 확실하진 않습니다. 이때 이루어진 조사 사업은 『조선의 군중』(1926),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1927), 『조선의 유사종교』(1935), 『조선의 향토오락』(1941) 등 10여 권에 이르는 책으로 엮였습니다. 특히나 무속신앙에 대한 자료도 여러 권이다 보니, 민속학 연구 자료로 꽤나 가치를 지니는 듯합니다. 김희영은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인식-조선총독부 조사 자료를 중심으로>에서 “조사 방법상 전문가가 아닌 경찰행정력을 동원했다는 점과 자국 문화에 비추어서 조선을 이해하려 했던 태도, 조사보고서가 식민지정책에 이용되었다는 점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받고 있다”라고 하면서도, “일제강점기 시대의 조선민속 관련 자료가 그다지 많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오늘날에도 한국의 민속연구에 있어서 그의 보고서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김만태는 <무라야마 지쥰의 조선 점복조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 “인류 보편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무라야마는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자의적으로 조선 점복풍속을 통해 조선인은 미개하고 타율적·소극적이라고 왜곡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 충실”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승려의 양자란 점, 귀국 후에 양부의 사찰을 물려받아 주지 업무를 이어갔다는 점, 별다른 민속학 연구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살펴본다면, 무라야마는 종교학자나 민속학자가 아닌, 제국대학 출신 엘리트 관료로 식민지 정부에 복무한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민속학적으로는 ‘1도 살펴볼 것이 없는 책’이지만, 자료만으로 봤을 때는 ‘인력을 갈아 넣은 듯한’ 충실성이 확인됩니다.

 사실 민속학이란 학문 자체가 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학문적 외형을 갖출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세기 독일에서 對계몽주의, 對패권주의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나 그림 형제에 의해 추진된 문헌학과 유스투스 뫼저의 향토사회 연구가 결합되면서 학문적 외형을 갖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도입되어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国男)를 중심으로 분과학문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도 1920년대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에도 민속학은 국문학의 한 갈래인 구비문학이나 민담의 연구이거나, 사학의 깊숙한 갈래인 문화사의 한 흐름으로 연구하거나, 사회학으로서의 사회사, 경제학으로서의 경제사, 건축학으로서의 거주사 등으로 다루어지기도 해서 독자적 분과학문(discipline)으로 정착되는 데는 제법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라야마 준지의 작업(works)이 온전한 민속학 연구자료라고 보는 건 무리인 듯합니다.



3. 읽어 봤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


 무라야마는 교육받은 민속학자가 아니다 보니, 이 책의 구성은 짜증 날 정도로 중구난방입니다. 제대로 된 입문서를 기대하고 읽었다면 진즉에 책장을 덮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민속학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위해 첫 입문서로 선택한 것도 아니고, 이 책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한 것도 아니라서, 그냥저냥 참아가면서 독서를 마쳤습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문헌조사를 통해 민담을 분석하거나 개념을 알아보며, 이를 통해 귀신의 유형을 분석합니다. 뒷부분은 구술자료에서 분석한 ‘귀신 쫓는 법禳鬼法’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정리하고 있다고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로, 양귀법에 대한 분석은 중복되고 자의적입니다. 도저히 ‘학술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민담 분석을 위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헌들이 등장합니다. 5차 교육과정 국어과 수업에서 충분히 다루었고, 수능 이전 학력고사 세대라면 응당 외웠어야 하는 고전문학의 ‘고전’들 말입니다. 삼국유사나 동국여지승람은 말할 것도 없고, 패관잡기나 용재총화, 청구야담, 해동잡록, 필원잡기와 같은 서적들이 ‘이름만큼’은 익숙합니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만 고전문학과 고대와 중세 국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터라, 다시금 이 책들을 살펴볼 일은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야 진즉에 읽어봤어야 했다며 자책했습니다. 문학비평이론과 국어 통사론에 매몰되어 시야가 좁아져 있던 20여 년 전의 제 자신이 참 어리석었다는 뒤늦은 후회만 밀려왔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블라디미르 프로프가 <민담형태론>에서 분석한 방식을 따라 형식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민속학의 연구방법으로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겠다 싶습니다. 민담은 놀라우리만치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귀신과 같은’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는 경우에도 ‘귀신같이’ 일치하는 요소들이 등장하곤 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죠. 이 때문에 보편성을 갖춘 학문으로서의 민속학을 연구하는 이유와 가치가 설명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무라야마는 그런 보편 요소를 애써 외면하며 문학비평이론으로도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해석들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극동 3국은 주자학의 영향이 지대하다 보니, 귀신에 대한 ‘이념적 이해’를 위해 그 개념도 주자학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주자학의 이기론에 바탕을 두면서, 귀신-백혼-굴신과 같은 개념이 도출되었다고 파악합니다. 여기에 도교적 음양오행설이 부가되면서, 鬼는 陰이요 精靈이며 魄이라고 봤으며, 神은 陽이요 神明이며 魂이라는 개념을 도출합니다. 여기에 도깨비가 독각귀(獨脚鬼), 두두리(豆豆里), 망량(魍魎), 이매(魑魅), 목랑(木郞), 목매(木魅) 등으로 언급된다고도 분석했습니다. 물론 김종대와 같은 학자는 “도깨비는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갖고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서 자생하여 성장해 온 독특한 존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용재총화(慵齋叢話) 등 우리 옛글 속에서 도깨비를 한자로 표기할 때 귀나 독각귀, 이매망량 등을 사용한 것이 도깨비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익의 성호사설, 김시습의 금오신화, 정도전의 삼봉집 등이 등장하는데요, 이 익숙한 이름의 저작들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또 헛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지식 착각 illusion of knowledge 그러니까 이름이나 대략적인 정보를 알고 있는 정도로 대상을 ‘잘 안다는 착각’에 빠져 있던 자신을 다시금 발견하면서, 자신의 오만을 또 한 번 반성하게 됩니다. 책을 한 권 읽었더니, 앞으로 읽어봐야 할 책이 열 권쯤 늘어나 버렸습니다. 아이고라는 곡소리가 나옵니다.



4.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을 수밖에 없다.


 귀신 푸닥거리 방법, 그러니까 양귀법에 대해서는 무려 300쪽에 걸쳐서 중언부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신문기사들을 통해 사건화 된 사례까지 취합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유용한 ‘자료’입니다. 물론, 분류는 개판입니다. 이 좋은 자료들을 모아서, 이 따위로밖에 정리를 못하나 하는 짜증이 솟을 정도로 말입니다.

 ‘귀신이 들었을 때’ 그 귀신(鬼)을 쫓아내는(禳) 방법을 무려 14가지 방식에 기타 3가지 방식을 더해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재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보다 더 강한 귀신을 잘 달래서 내보내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귀신보다 더 강한 사람이 억지로 내쫓는 방식입니다. 앞의 방식은 供物을 제공하는 祭의 방식을 씁니다. 뒤엣것은 무당 등의 샤먼이 푸닥거리를 하거나 符籍 등을 사용해 구축하는 방식이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샤먼은 잘 달래는 방식의 祭를 주재하기도 하지만, 때려서 쫓아내는 것과 같은 푸닥거리를 맡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전염병을 疫神이라고 보고 양귀 행위를 하거나, 정신병이나 의원을 통해 치료하지 못한 중병이나 외상에 양귀 행위를 한다는 점도 주목해 볼 만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게 ‘흰 개의 똥’입니다. 그냥 개똥도 약으로 등장합니다만, 아무래도 상서롭다는 ‘흰색’이 약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티푸스/장티푸스, 홍역, 폐병/호흡기병과 같은 질병에도 개똥이 쓰이며, 타박상이나 골정사에도 개똥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개똥을 약에 쓰려는 상황은 주로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타박 골절상 환자가 다수 발생해서 약이 모라자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다수의 환자가 발생했을 때에야 비로소 ‘개똥도 약에 쓰게’ 되는 것이라서, 수요의 급증에 따라 그 흔한 개똥도 수급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는 상황이 나오는 거겠죠.

 양귀법에 사용하는 도구나 재료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많습니다. 우선 동쪽으로 뻗은 복사나무 가지입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도 등장하는 복사나무는 도교적 맥락에서 척사(斥邪)의 기능을 갖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푸닥거리에서 복사나무 가지가 등장합니다. 그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도구는 도끼입니다. 부적에도 도끼는 종종 등장합니다.  보통 귀신의 혐오감을 자극할 수 있는 것들이 ‘약’으로 쓰입니다. 개똥, 소똥, 돼지똥, 닭똥은 물론이고, 소의 피나 돼지 피, 닭 피도 일반적입니다. 사람의 분뇨나 인육, 인골, 태(胎)도 빠질 수는 없습니다. 이런 걸 그냥 먹인다면, 나을 병도 다시 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다 성공적인 샤먼들은 직접 먹이는 방식을 회피하는 지식을 획득했을 것이며, 그래서 태운 연기나 태운 재를 물에 타 먹이는 방식으로 ‘진화’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물(供物)로 쓰는 것들도 익숙합니다. 간단하게는 井華水에서 쌀로 만드는 죽/밥(팥밥)/떡이나 소, 돼지, 개의 고기도 쓰입니다.

 부적(符籍)에서도 꽤나 재미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부적 그림을 살펴보면 勅(칙) 자와 諸鬼消滅符(제귀소멸부)라는 글자가 자주 보입니다. 특히나 칙자는 한 글자인지라 거의 대부분의 부적에 등장합니다. 현대에 유통되는 부적에도 여지없더군요. 드라마 《우수무당 가두심》에 등장하는 부적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진짜 재미있는 것은 ‘한자를 그리는 경우’입니다. 한자를 모르는 샤먼이 ‘대충 열심히 그린 한자’는 더 그럴싸한 부적이 됩니다. 지금과 같은 좌우대칭의 ‘회화적 부적’은 한자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여성 샤먼, 즉 무당에 의해 ‘그려지면서’ 정형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석기시대의 구상 회화가 신석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세련된 추상 회화로 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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