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이원율. 결정적 그림. 은행나무. 2024년.
지난달 말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를 관람했고, 화풀이하듯 리뷰를 썼습니다. 거의 현대미술과 MMCA 전시행정에 대한 침 뱉기 수준의 글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현대미술을 ‘미술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데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얕고 좁은 미술 지식은 매번 현대미술과 불화했고, 그 불화의 결과는 종종 독서를 통한 지식의 습득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경우는 저주에 가까운 리뷰를 쓰는 것으로 끝났지만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무언가 책을 한 권 읽어보자 마음먹었는데요,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정면 도전을 택하기보다는 회화로의 일보 후퇴를 택했습니다. 제 딴에는 회화라면 제법 알고 있다고 착각한 탓이었습니다.
인지심리학에는 '지식 착각 illusion of knowledge'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일상 속 사물들의 작동 원리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믿게 만드는 지식 착각은 복잡계 complex sytems와 관련된 문제를 판단할 때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살면서 사물이 작동하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해야 할 필요는 거의 없기 때문에, 단지 어떻게 작동하는지만 이해하면 된다는 거죠. 예를 들어, 화장실 변기에서 물이 빠져나가고 채워지는 원리는 몰라도, 변기를 사용할 수 있으면 우리는 변기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공부한 것에 대해서 남들보다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과해져서, 실제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전문가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저도 그랬더군요. 미술사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고, 주요한 미술가의 위대한 작품에 대해 평균 이상의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책을 읽다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구나 하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알폰스 무하와 같은 미술가들은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에곤 실레는 물론이고, 르네 마그리트나 이중섭, 프리다 칼로의 경우에는 그들의 결정적 순간이 언제였으며 대표적 작품이 무엇이다고 확정적으로 정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쭉정이였던 자신을 반복해서 확인하게 되면서 꽤나 충격이었습니다.
제대로 지식을 쌓았다고 한다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꾸”몄고 그래서 “단편 소설의 성격을 갖고 있는” 글들의 허점들을 충분히 메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미술가들의 개인사적 유전(流轉)에 천착하는 것으로 따라 읽기 편하고 재밌기만 한 글에 제대로 된 대꾸 한 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decisive moment’에서 파생했을 터인 ‘결정적 그림’이라는 제목에 글이 어울리는가를 확정적으로 논박하지도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이건 좀 아니다 싶은데’라는 딴지 걸기가 고작이었죠. 코가 쏙 빠졌습니다.
저자인 이원율은 <헤럴드경제> 기자로 지난 2022년부터 2년 넘게 매주 토요일에 ‘후암동 미술관’ 기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 연재기사 중에서 22개 정도를 갈무리해서 책으로 엮었다고 합니다. "이번 출간 과정을 거치며 이 책에 담길 기사를 모두 다시 읽"고, "그때는 미처 볼 수 없었던 곁가지는 쳐내는 한편 알맹이는 새롭게 주워 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각 예술가의 프로필과 평가, 비하인드 스토리를 추가해 탄탄함을 더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한쪽 분량의 추가 원고로 딱히 '탄탄함'이 더해질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리 페이지가 있다는 점은 이런 식의 옴니버스 구성에서는 효과적인 구성이란 점만큼은 인정해야 할 듯합니다.
읽기 쉽고 편하다는 것은 책이 가지는 중요한 미덕 중에 하나입니다. 글이 쓸데없이 무겁고 어려울 바에야 가볍고 쉬운 편이 낫다고도 생각합니다. 글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인 저도 여섯 시간 정도에 독파할 수 있었습니다. 책이 두껍기는 하지만 절반은 이미지로 채워져 있고, 텍스트마저도 빽빽한 스타일은 아니라서 그렇겠죠. 무엇보다 쉽게 따라 읽을 수 있는 서사적 기술이란 점도 한몫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미덕이자 장점만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서사기법으로 인해 과장된 감정이나 오평가된 사실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작가에 대한 치열한 분석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지레짐작으로 쓴 '소설'이 중요한 의미를 호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흥미로운 주말판 신문 기사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한 권의 책으로 다시 엮어냈다면 그 부분에 대한 책임감을 더 크게 느껴야 할 겁니다.
책을 읽다 보면 고유명사의 번역에서 제멋대로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외래어표기법에 따른 정확한 표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오류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주로 네덜란드어나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등의 북구 언어나 포르투갈어에서 표기 오류가 쉽게 발견되는 편이지만, 이 책에선 잘 지켜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미 익숙해져서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그대로 쓰면서도, 외래어표기법을 써야 할 곳에서는 제대로 사용되었습니다. 기자다운 꼼꼼한 글쓰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의 표기는 아주 제멋대로였습니다. 139쪽에서는 '에콜 데 보자르(파리 국립 고등예술학교)'로, 175쪽에서는 '파리 국립미술학교'로, 228쪽에서는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로 말이죠. 보통 이런 혼돈은 '남의 글을 아무 생각 없이 베껴적을 때' 발생합니다. 맥락상으로 잘못된 것은 없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만한 것이지만, 쓸데없이 이상한 것에 예민한 저 같은 사람은 이런 디테일로 인해 글에 대한 불만을 말하게 됩니다.
일전에 『살롱 드 경성』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이렇게 정리했었습니다.
연재 기고문을 엮어서 책을 쓴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큰 적은 나태와 오만입니다. 이미 써본 글이라는 오만과 그 과정에서 축적된 자료 조사로 인한 나태는 기고문의 분절되고 짧은 호흡과는 아주 다른 단행본의 호흡으로 바꾸는 작업을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논문을 가지고 대중서를 쓰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과정이기도 하죠. 꾸준히 쌓인 원고와 그 못지않게 쌓인 조사 자료는 금방이라도 책 한 권을 엮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만, 대체로 제대로 된 ‘책’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새로 글을 써야 한다는 그 귀찮은 작업에 돌입하기보다는 있는 원고들을 대충 범주화해서 무성의하게 묶는 일로 단행본 원고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원율은 다시 써야 할 부분은 제대로 다시 쓰고,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잘 녹여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연재 기사를 엮은 책이란 점에서는 성공적인 작업이었다고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