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기시미 이치로.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인플루엔셜. 2020
2021년 말쯤에 브런치 계정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독서, 출판, 유통 문화에 대해 고민해 볼 작정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써본 글의 제목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였습니다.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다 이유와 목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라고 질문해 봅니다. 저 때 쓴 글은 그 이유 중에 하나를 찾아보는 작업이었는데요, 책을 읽는 목적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하지 않았더군요. 그 이후로 브런치에 쓰는 상당수의 북리뷰는 책을 읽는 목적에 관한 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의문은 왜 책을 사야 하는가에서 시작된 질문이었고, 왜 책을 사야 하는가는 왜 서점에 가야 하는가에서 시작된 물음이었습니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독서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서점에서 책을 사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입맛이 개운하지 않았던 탓입니다. 무언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었죠. 그래서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탐색은 언제나처럼 꼰대적 마인드로 접근하다 보니, '독서의 이유‘나 '독서의 목적‘과 같은 제목의 책을 찾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찾아 놓았던 책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기시미 이치로(岸見 一郎)의 책에 더 이상 눈길을 줄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도 들어본 적이 있는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일지라도, 저는 그 책에 관심이 없었으니 그 저자인들 알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2년 반이나 지나고 나서, 동네 도서관의 관심도서목록에서 이 책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최근 책을 읽는 이유를 여러 각도에서 정리해 보는 중인지라, 무언가 빠뜨린 것이 없을까 싶어서 도움을 좀 받아볼 작정으로 펼쳐보았습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반 1등인 학생과 답을 맞혀보는 심정으로 말이죠. 딱히 빠뜨린 내용은 없는 듯하여 적이 안심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원서 제목을 확인해 보면 번역서 제목과 내용 사이의 괴리를 해소할 수 있게 됩니다. 하도 짜증을 내다보니, 이젠 인이 박인 것인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됐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책을 어떻게 읽을까:행복해지는 독서술(本をどう読むか: 幸せになる読書術)>입니다. 제목만 봐도 그렇고, 책을 읽어 봐도 그런데요, 어떻게 읽을까에 초점이 맞춰졌지, 왜 읽을까에 초점이 맞춰지진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첫 장에서 책을 읽는 이유로 “그저 즐겁게 읽으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책을 읽는 이유 따위 별 거 없어서, <제1장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첫 번째로 지식 습득이 독서의 목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한 번 언급했지만, 무언가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 먼저 쌓아 올린 지식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면, 책을 읽는 것이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쓰이는 방식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와 같은 꼰대들은 일단 책부터 찾아 읽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혼자서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지식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 41쪽
다만 지식의 습득에만 매달리다 보면, ’해야만 하는 공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만 이루어지면, 독서가 즐거울 리가 없습니다. 상호작용이 없이, 일방적으로 자기 수업만 진행하는 따분한 강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거죠. 재밌는 강의는 중간중간 수강생들과 강의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갖게 됩니다. 적절한 질문을 통해 수강생들이 지금까지 들었던 내용을 곱씹게 만들고, 답변을 유도하면서 참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게 되면 수강생들은 강의에 더 몰입하게 되곤 하죠.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기시미 이치로는 이런 말을 덧붙인 것이겠죠.
결과적으로 책을 읽으면 뭔가를 배우게 된다. 다만 뭔가 배우는 걸 독서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책을 읽는 즐거움이 훼손될지도 모른다. - 50쪽
두 번째는 추체험(追體驗, Nacherleben)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처럼 느낌” 정도로 간단히 이해해도 좋지만, 학술적인 개념으로서의 추체험에 대해서도 잠깐 확인해 보고 넘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합니다.
『역사적 세계의 구축』에서 딜타이는 추체험을 “영향의 전개를 거슬러 추적하는 역진적 작업(inverse Operation)”으로 정의했다. 거기에서 “이해는 사건 자체의 전개과정을 따라 진행된다. 이해는 삶의 전개과정 자체와 더불어 지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Dilthey, 1981 [1910]: 265).
즉 타인의 의미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딜타이가 ‘삶 자체’와 동일시했던 타인과의 영향관계를 이해하고, 또한 그가 삶의 체험들을 어떤 연관관계로 엮어서 의미화하고 있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해를 통해 그의 삶의 역사성과, 또한 그 속에 녹아들어 있는 공동체의 역사성을 재구성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추체험적 인식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신진욱. <삶의 역사성과 추체험 - 딜타이의 의미 이론과 해석학적 재구성 방법론->. 담론201, pp. 105 - 131, 2009.
인문학 분야에서는 주로 역사나 문학과 같이 서사(敍事)가 있는 곳에서 추체험은 유효하다고 봅니다. 쉽게 말해, 역사적 사건이나 문학 작품 속 등장인물의 감정과 사고방식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겁니다. 특히 인간의 지식이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해석과 이해를 통해 형성되기에, 과거의 경험이나 타인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감 능력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책을 읽으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추체험, 즉 자기가 체험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자신이 몰랐던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아는 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고 이는 인생의 경험을 넓혀준다. -45쪽
세 번째는 즐겁고 재밌는 정신 작용으로서의 독서를 이야기합니다. “그저 즐겁게 읽으면 그것이 행복”이라는 겁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 정통한 작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 그러니까 “실천적인 좋음들 가운데 최고선은 행복 eudaimonia”이라고 보고 쓴 말을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그냥 만족감에서 오는 기쁨 정도의 일반적 의미로 쓴 것일 테죠. 그래서 불만족스러워서 행복할 수 없다면, 굳이 독서를 계속할 이유는 없다고 제안합니다. 소설가 김영하 역시도 “책이 충분히 재밌지 않으면 우리는 책장을 덮고 책을 그만 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도 됩니다.”라고 말했죠. 책을 읽는 목적을 생각해 본다면, 굳이 괴로워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재미가 없으면 도중에 그만 읽어도 된다. 제대로 된 책이라면 그렇게 하더라도 독자에게 무언가를 남길 것이다. - 53쪽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 책을 끝까지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읽다가 재미없으면 그만 읽을 용기도 필요하다. 재미가 없다고 해서 그 책이 좋지 않은 책이라는 뜻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지금은 필요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럴 때 책을 덮을 용기를 내지 않으면 시간을 헛되이 쓰게 된다. - 145쪽
저는 책을 읽고 나면 꼭 리뷰를 씁니다. 리뷰를 쓰는 것은 책을 한 번 더 꼽씹어 보는 행동인지라 이 책에서도 ‘행복해지는 독서술’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꼭 리뷰를 써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즐거움을 반감시킬 이유 또한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독서가 즐겁지 않고 괴롭기만 하다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재미를 위해서 책을 읽으려는데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그것이 독서의 재미를 앗아갈 것이다. - 2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