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철 Jun 13. 2024

신간 서적 선택법 3: 마침 그 주제의 책이 나왔다.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1. 마침 그 주제의 책이 나왔다.


 2021년 1월 6일에 발생한 미의회습격사건(January 6 United States Capitol Attack)은 미국인들만큼이나 전 세계인들이 경악한 일이었습니다. 특히나 자신들도 모르게 미국 예외주의에 찌들어 있던 미국 지식인들에게는 꽤나 큰 상처가 된 사건이었나 봅니다.

 “그 광경을 지켜봤던 많은 미국인은 다른 나라 국민들이 그들의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느꼈던 공포와 혼란, 분노의 감정을 똑같이 느꼈다”라고 저자들은 머리말에 썼습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된 폭력의 흐름, 선거 운동원에 대한 위협, 투표를 더 힘들게 만든 갖가지 시도,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는 대통령의 획책 등 미국인들이 목격한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민주주의의 퇴보”였지만, ”2016~2021년 사이에 미국은 무너지지 않았다“고도 쓰고 있습니다. 다만 ”그동안 민주주의가 퇴보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2022년 3월 10일이 떠오릅니다. 저는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어도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글을 정리했었습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곧 망할 것만 같은 혼란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망할 것 같다는 곡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끝내 망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라고 끝을 맺었고요. 그래서인지, ‘미국은 무너지지 않았다’는 표현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인지는 잘 알겠더군요.  


 공교롭게도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책을 처음 접한 이유 역시 윤석열 정부 때문이었습니다. 이 망아지 같은 정권의 폭주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난감했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글로 풀어내려고 보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래서 ”책이라도 읽어보자 싶어“ 우연하게 집어 들었던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였습니다.

 그리고 올해 3월에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다시 살펴봤습니다. 이번에는 무언가 글로 정리해내지 않고는 속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서였습니다. 우리 대통령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저자들의 책을 살펴본 다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경멸을 담아, 한껏 조롱하는 글을 써냈습니다.

 총선이 치러진 날에도 글 한 편을 정리했습니다. ”여권의 의석수가 100석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승리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 묻겠지만, 이게 뉴노멀이라서 그렇다.“라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이 정권은 거부권 행사를 통해 소수 여당으로 ‘소수의 독재’를 계속해 나아갈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시점에 이 책이 나왔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이 책은 다시 펼쳐보지 않을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 시기적으로 참 적절하기도 합니다.



2.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 Between Scylla and Charybdis


 이 책의 원제는 <Tyranny of the Minority: How to Reverse an Authoritarian Turn, and Forge a Democracy for All>입니다. ‘소수의 폭정: 독재적 면모를 뒤집어서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로 둔갑시키는 법’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미국의 헌법과 정치적 관행들이 250년의 공화국 역사 속에서 어떻게 ‘소수의 지배’를 가능하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기만적인 합리화 논리에도 강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설립자들은 그들의 나라가 다수의 독재라는 스킬라에게서 멀어지도록 함으로써 소수의 지배라고 하는 카리브디스에 가깝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 21쪽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중용을 이야기하며, 양 극단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며,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12권 219행의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햐 하지만, 현실은 간혹 양자택일의 상황을 만듭니다. 그럴 때는 “중간을 맞추기란 극히 어려우므로 사람들 말마따나 차선책으로, 두 악 가운데 덜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도 조언했습니다.

 저자들은 머리말에서 “한 가지만큼은 분명한데, 그것은 미국의 제도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다수의 독재라는 스킬라가 차라리 나은 ‘차선책’임을 강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잠시 용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 체재는 양당제입니다. 그것도 어느 한쪽이 압도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미국 상원은 50개 주에서 상원의원 2명씩을 선출합니다. 총 100명으로 구성되는 상원은 현재 민주당 47명에 민주당 코커스(caucus, 교섭단체와 비슷한 개념)에 속하는 4명의 무소속 의원이 원내 다수(majority)를 이룹니다. 49명의 공화당 의원이 상원의 소수(minority)를 이루죠. 51:49의 상황에서 단지 2가 많다는 이유로 민주당이 다수가 됩니다. 하원은 총 435석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다수가 되려면 218석이 필요합니다. 현재 공화당이 딱 218석으로 다수입니다. 나머지 217석에서 공석 4석을 빼면 민주당의 213석이 나옵니다. 5석 차이로 다수와 소수가 나뉩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상황인 거죠. 전 세계 어디에도 이런 양당제 상황은 없습니다. 심지어 양극화가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도 제3당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미국 정치에선 그런 게 없습니다. 이 양당제가 미국 정치를 극단의 양극화로 몰고 와서, 지금의 파국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3. 독재의 평범성 banality of authoritarianism

 이것이 바로 독재의 평범성 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이 의미하는 바다. 민주주의 붕괴를 주도하는 많은 정치인은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거나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서려는 야심 찬 경력지상주의자다. 그들은 심오한 원칙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에 무관심할 뿐이다. 그들이 반민주적 극단주의를 묵인하는 이유는 그게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들 정치인은 단지 앞서 나가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할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붕괴에 반드시 필요한 조력자 역할을 맡게 된다. -76쪽

 해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평범성(banality)의 개념을 확장해 저자들은 ‘독재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체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나치나 일제에 복무했던 수많은 이들의 ‘평범성’은 여느 독재 정권에서도 마찬가지 기제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심지어 효능감(Efficacy)이 높다 보니, 쉽게 유혹에 빠집니다. 특히나 그 효능감이 제대로 기술된 <4장 왜 공화당은 민주주의를 저버렸나>를 읽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몇몇 고유명사를 치환하는 것으로 대한민국 사회가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를 윤석열로, 공화당을 국민의힘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이번 총선과 그 이후의 국민의힘이 보여주었던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 설명되기도 합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공화당의 급진적 행보를 가속화했다. 트럼프의 성공은 백인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치가 공화당 내에서 승리의 공식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리고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공화당 정치인들은 트럼프의 스타일과 태도를 그대로 따라 했다. 반면 트럼프 열차에 탑승하기를 거부한 많은 공화당 정치인은 은퇴하거나, 아니면 예비선거에서 패했다. 2020년에 트럼프에 반기를 들었던 어떤 계파도 공화당 내에 머물러 있지 못했고, 이로 인해 트럼프의 극단주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대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말았다. - 172쪽



4. 미국의 거지 같은 헌법과 정치 규범


 미국 헌법 체계 속에는 이례적으로 많은 반다수결주의 제도가 자리 잡고 있고, 이것이 소수의 폭정(tyranny of the minority)을 가능하게 한다고 봤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권리 장전.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회의가 끝난 1791년에 헌법에 추가되었다.

- 대법원. 종신 재직권을 받은 판사들로 구성되며 사법심사 권한, 다시 말해 의회 다수가 통과시킨 법을 위헌으로 판단하여 폐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 연방주의. 국가적 다수의 영향력을 넘어선 상당한 입법 권한을 주 및 지방정부에 이양했다.

- 상하원 양원제. 법안 통과를 위해 두 의회의 다수가 필요하다.

- 심각하게 불균형하게 할당된 상원. 모든 주는 인구수에 상관없이 상원에서 동등한 대표권을 갖는다.

- 필리버스터. 상원의 압도적 다수 규칙(헌법에 들어 있지 않은)으로 정치적 소수가 다수가 지지하는 입법을 영구적으로 가로막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

- 선거인단. 작은 주에 특혜를 주고 보통 선거의 패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통령 간접선거 제도.

- 헌법 수정을 위한 극단적으로 압도적인 다수 규칙. 상하원 모두 2/3 이상 찬성해야 하고, 전체 주의 3/4이 비준해야 한다.


 따라서 저자들은 “민주주의 스스로 교정한다”고 못 박으면서, “경쟁적인 선거를 통해 유권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다만, “유권자 다수를 확보하지 않고서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정당들은 유권자에 반응해야 하는 경쟁적인 압박에서 벗어나 내부에 집중함으로써 급진화를 행해 나아가게 된다”며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이 하고자 싶었던 말들은 제인 애덤스 Jane Addams의 “The cure for the ills of Democracy is more Democracy”라는 발언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반드시 논의해야 할 세 가지 개혁’이라며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죠.


가. 투표권을 확립해야 한다.

 1. 모든 시민에게 투표권을 보장하는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2. 모든 시민이 18세가 되었을 때 유권자로 등록되는 자동등록제를 도입해야 한다.

 3.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

 4. 선거일을 일요일이나 국경일로 정해서 업무가 시민의 투표를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 형기를 마친 중범죄자의 투표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6. 국가 차원에서 투표권 보호를 위해 선거규칙 및 관리에 관한 연방의 감시를 회복시켜야 한다.

 7. 현재의 당파적인 선거관리 시스템을 공정하고 전문적인 인력을 바탕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


나. 선거 결과가 다수의 선택을 반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8.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고 이를 전국적인 보통선거로 대체해야 한다.

 9. 상원을 개혁해서 주에서 선출한 상원 의원 수가 각 주의 인구수와 비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10. 하원과 주 의회는 비례대표제로 바꿔야 한다.

 11. 당파적인 게리맨더링을 없애야 한다.

 12. 하원의 규모를 인구 성장에 따라 확장하는 하원의 원래 설계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다. 지배하는 다수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

 13. 상원 필리버스터를 폐지해야 한다.

 14. 대법원 판사에 대한 임기 제한을 규정해야 한다.

 15. 헌법 수정을 위한 3/4에 달하는 주의 비준 요건을 제거함으로써 헌법 수정을 더 쉽게 만들어야 한다.


 저자들은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침묵”이라며, 헌법 개정에 대한 목소리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 “야심 찬 아이디어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릴 때,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라며 지식인 사회의 부단한 노력도 주문하고 있습니다. 저자 자신이 직접 실천하고 있기도 하고요.

 또한 법학자 아지즈 라나 Aziz Rana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거의 도그마로 승화한 미국 헌법에 대한 절대적 믿음도 질타하고 있습니다. 250년 전, 이전에 없던 공화국이란 정체를 만들어 내면서 참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점도 여러 차례 지적해 왔기에, 미국 헌법 역시 시대에 맞춰 수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당파적 이익 앞에서 개헌 반대 입장에서 취하는 ‘헌법 수호 의지’는 교정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울학이란 어정쩡한 학문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