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송은영. 서울탄생기. 푸른역사. 2018.
서울학은 역사학, 도시학, 행정학, 건축학, 국문학 등 각 분과 학문의 연계하에 이루어졌으며, 현재는 “서울의 생성, 성장, 발달 및 변천 과정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하나의 새로운 독자 학문으로 발전”했다(유승희, <서울학 연구의 현재적 의미와 한계>)고 봅니다. 1994년 ‘서울학연구소’가 창설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울학 연구는 도시史와 지역학 연구 성과 속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역학이나 도시사의 틀을 가지고 그 일부로서 서울을 제한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서울학 그 자체로서는 한계가 있다”고도 보았습니다.
지역학은 학제간 연구(學際間硏究, Interdisciplinarity)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일환으로서의 서울학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실제 이루어지고 있는 연구는 학제간 연구라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저 각각의 학자들이 자기 분야의 연구 방법으로 자신들의 연구를 발표하고 있을 뿐이어서 그렇습니다. 전혀 학제간 연구로 보이지 않습니다.
서울학의 이런 모습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국문학에서의 20세기 연구가 그랬던 것입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도시 연구를 포함하여 문화 연구까지도 허공에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모더니티 또는 식민지 근대성과 풍속사, 서양의 문화와 도시이론 같은 틀에 기댄 당시 연구들은 기존 개념에 기대어 자신들이 보고 싶은 부분만 바라보고 있었다. - 10쪽
언어사나 문학사의 연구는 국어학계나 국문학계가 해야 할 일일 겁니다. 여기에 민속학까지도 언어사나 문학사의 연구 방법이 동원되어야 할 터인지라 분명 국어국문학이 동원되야 할 지점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2000년대부터 국문학의 연구 영역이 이상하게 넓어졌습니다. 사학과 철학을 아우르며 비평과 사회과학의 그 어중간한 지점에서 ‘자신들이 보고 싶은 부분만 바라보고’ 허우적거리는 경우들이 잦아졌습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머리말에서 송은영은 “1960~70년대 서울의 도시문화와 사회사를 다시 그려볼 필요성을 느꼈다”면서 “문학 텍스트들을 통해 그 역사적 체험과 생활의 실감을 어떻게 재현하고 생산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라고 했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 “당대에 나온 소설 거의 전부를 읽어가며 지리적 사실들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한국 도시사를 비롯하여 지리학, 건축학 등 생소한 분야의 논문도 읽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박사논문을 10여 년이 지나고 나서 “거의 다시 써서, 박사논문과 완전히 다른 책”이라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목 ‘서울 탄생기’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책 제목 때문에 골라잡았지만, 읽는 내내 제목은 생각하지도 않고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막상 리뷰를 쓰려고 보니, 제목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1395년에 확립된 행정구역으로서의 한성이나 1910년 일제의 병탄 이후 개칭된 경성과 달리, 1946년 <서울시헌장>을 통해 새로 마련된 행정구역명으로서의 서울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건 아닐 겁니다. 1966년과 1972년을 주요 변곡점으로 삼아서 60년대와 70년대를 조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서울 모습의 원형이 이때서야 잡혔다고 본 것이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변곡점으로 삼은 66년과 72년이 지금의 모습에 끼친 영향이 작진 않습니다만, 지금까지 제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어림없기 때문입니다. 1894년, 1905년, 1936년, 1950~53년, 1958년도 지금의 서울 모습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렇다 보니 1960년대와 70년대는 서울이 탄생한 시기(時期)가 될 수 없으니, 탄생기(誕生記)를 쓸 수는 없겠지요. 너무 과한 제목을 끌어다 쓴 듯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신경 쓰지 않고 부제인 ‘1960~70년대 문학으로 본 현대도시 서울의 사회사’에만 집중한다면, 무척 재밌는 독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서울의 인구집중현상에 대해서도 약간의 헛발질을 합니다. 서울을 향한 “전도된 향수병”은 이미 192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비단 “1950년대 중반 시작된 서울을 향한 행렬은 1980년대까지도 줄기차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1920년대 시작한 행렬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현재 서울은 인구 순유출이 일어나고 있지만, 기껏해야 서울 인근의 위성도시로 ‘좀 더 넓은 집’을 구해 떠난 것일 뿐입니다. 주민등록만 서울이 아닐 뿐, 여전히 서울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죠. 이 역시 ‘자신들이 보고 싶은 부분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1920년대 후반 식민지배층을 위한 집단주택지가 개발됐습니다. 남산 서남쪽 자락의 용산 일대와 후암동(당시 삼판동 일대 학강주택지와 신정대주택지), 서대문 밖 금화산 자락 충정로(충정로3가 일대 금화주택지), 남산 자락 장충동 일대 주택지(소화원 주택지)와 장충동 주택지가 당시 개발된 주택지입니다. 1930년대에는 도성 밖에 대규모 택지가 개발되면서 수십에서 수백 개의 집단 필지가 조성되었습니다. 서쪽의 연희장주택지(북아현동), 서대문 옆 영천주택지(영천동), 천연장주택지(천연동), 일대와 용산구 녹구주택지(청파동), 동쪽의 앵구주택지(청구동)와 신당동 일대입니다. 1930년대 후반 서울 도심과 도성 근처에 주택을 대량으로 지을 만한 택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되면서 일본 식민정부는 도성 밖 외곽에 신시가지를 개발했습니다. 돈암동, 보문동, 신촌, 영등포, 상도동, 번대방(대방동)은 이때 개발된 신시가지입니다. 이렇게만 살펴봐도, 서울의 탄생기를 논하기엔 1960~70년대는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1966년의 경험과 각성이 “무장소성(placelessness)의 서울”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서울의 주거 공간과 도시 경관이 무역사적이고 무장소적인 것으로 변화해가고 있음을 포착하고 있다. 이는 서울의 변화 중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변화 중의 하나다. 에드웨드 렐프(Edward Relph)의 말에 따르면, 무장소적으로 변해가는 공간의 변화는 결국 ‘장소의 상실’이다. - 237쪽
남대문시장에서 서울역까지의 남대문로는 남대문에서 태평로와 만나면 용산으로 쭉 뻗어나갑니다. 이 길가에서 벽을 맞댄 상업건축을 참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건축물들을 을지로3가에서 신당동까지도 꽤 볼 수가 있죠. 대부분 1950~60년대에 지어졌는데요, “한국전쟁 후 전재복구 과정에서 빠른 도시재건과 가로변 정비를 위해 주요 간선도로변에서 건축물의 이격거리 규정이 완화되거나 느슨하게 적용됐기 때문”입니다(이상헌, 『서울 어바니즘』, 공간서가, 2022). “1953년 건축행정요강의 1m 이상 이격 규정은 노선상업지역 및 폭 12m 이상 도로에서는 예외로 합벽건축이 가능하도록 허용했고, 1958년 민법은 건물을 대지경계선에서 반미터 이상 띄어 짓도록 했지만 착공 후 1년 또는 준공 후에는 손해배상만 청구할 수 있게 했으며, 또 특별한 관습이 있거나 인접 토지소유자가 동의하면 합벽건축의 건설은 합법적으로 가능”했다고도 설명합니다. 무엇보다 최초 건축허가에서는 가로변에 3층 건물만 지어도 되었는데, 이후에 5층 이상으로 증축할 것을 전제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꽤나 기괴한 구조의 건물들이 벽을 맞대고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오래된 저층 건물들이 지금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꽤나 신기한 일입니다. 도심 한복판에서 재개발의 파고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신기했는데요, 이에 대한 궁금증이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1971년 도시계획법이 전면 개정됐지만, 도심재개발구역의 지정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토지합병 절차와 막대한 자본 투입에 의한 문제로 민간투자자에 의한 재개발사업은 활발히 일어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특정정비가구> 지정제도가 도입하고, <특정지역 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1972)>을 만들어도 여전히 도심 재개발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976년 도시재개발법을 만들었어도 마차가지였고요. 그러다가 1979년 상황이 뒤집혀버렸습니다. 북한의 공격에 취약해질 수 있다며 강남개발로 정책이 전환된 겁니다. 이때부터 종로구와 중구의 재개발 요건이 까다로워졌고, 40년이 넘도록 재개발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송은영의 기술은 좀 부적합합니다. 강북 도심 재개발을 위한 노력들이 강남 개발을 위한 노력으로 둔갑해서 아주 반대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국적으로는 강남개발을 위해 도심 재개발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종로구와 중구의 기괴한 모습이 남아 있긴 합니다. 이를 통해 보다 나은 정보로 접근할 수 있었으니 큰 도움이 됐다고 봐야겠죠.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는 남대문로, 태평로, 을지로 등의 대로변에는 ‘상가주택’이라는 기능 혼합적인 건물들이 종종 지어졌다. 현재 을지로 4~6가의 뒷골목에는 상가, 공구, 조명, 미싱, 타일도기, 조각, 기구, 인쇄, 기계를 다루는 공장 등이 여전히 혼재하고 있다. 1970년대 강북 도심 개발이 전면적으로 제한되면서 1960~70년대의 시간이 그대로 박제된 채 남게 된 덕분이다. - 50쪽
1975년 4월 서울시가 강남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강북을 특정시설 제한구역으로 설정한 것은 강압적이지만 효과적인 조치였다. 서울시는 도심부 인구 분산 계획의 일환으로 종로구 및 중구 전역, 용산구와 마포구의 기존 시가지 전역, 성북구와 성동구의 강북 지역에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등의 신규 시설을 불허했다. 1973년 한 가지 조치가 뒤따랐다. 종로구, 중구 등의 도심 지역이 재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이 지역 일대 건물의 신축, 개축, 증축이 금지된 것이다. 또한 1972년에는 1978년 12월 31일까지 6년간 유효했던 ‘특정 지구 개발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어, 1973년 강남 지역이 개발촉진지구로 선정되었다. 그래서 수많은 상업시설이 아무런 규제도 없고 특별법에 의해 취득세, 재산세 등이 면제되는 강남으로 옮겨갔다. - 357쪽
1990년대 후반부터 박정희 시대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특히나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박정희 덕분’이 아니라, 동아시아 사회의 특수성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패망한 전범국인 일본, 그리고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선 한국과 대만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은 때마침 일어난 주변의 대형 전쟁(한국전쟁과 월남전쟁)이란 연료가 있었고, 동아시아 사회의 특유의 교육열이 만들어낸 인적 자원이 완전연소를 일으켰다는 겁니다. 굳이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터무니없는 독재자가 아니었다면 누구나 가능했다는 겁니다. 물론 독재자에 의한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필요했다는 점은 여전히 부정하기 어려운 듯합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엘리트들이 관료로 진출하면서 생긴 뿌리 깊은 부패는 경제성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 되기도 했다고 봅니다.
1966년 즈음 시작되어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거대한 규모의 외자 도입은 한국 경제에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했고, 이것은 고도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 182쪽
국가 전체의 경제 성장이야 그렇다 치지만, 서울이란 도시의 성장에서 1966년이 변곡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소에 집중해 보는 게 타당해 보입니다. ‘불도저 시장’ 김현옥의 막무가내식 건설 지정이야 서울역사박물관만 돌아보아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시정 목표가 시행될 수 있도록 ‘땔깜’인 재정과 물자가 지원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졌다는 점이 더 중요하게 봐야 할 지점으로 보입니다.
1966년 이후 서울 개발정책이 급속하게 추진될 수 있었던 원인은 다양하다. 흔히 거론되듯이 김현옥 서울시장의 불도저식 스타일이 큰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으로 시작된 경제 호황, 그리고 도시화의 의미와 방향에 대한 실무자들의 무지, 북한과의 경쟁심 때문에 서울을 평양보다 현대적인 도시로 개발하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 등도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서울 역사 연구자이자 당시 서울 시정 실무가였던 손정목은 여기에 촉진제가 된 한 가지 사건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방한이다. - 260쪽
물론, 존슨 대통령의 방한으로 드러난 수도 서울의 가난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불도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꽤나 서글픈 일입니다. 이와 관련한 송은영의 언급은 ‘뼈를 울리는 타격’이 됩니다.
서울시민들이 더 살기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도시개발이 추진된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층과 유학생 엘리트들이 수도 서울이 외국에 그럴듯하게 보이기를 원해서 도시 재개발이 시작되었다는 설명은 서울의 도시개발 논리에 대한 뼈아픈 지적이다. - 261쪽
이번 독서에서 가장 큰 성과는 판자촌 철거에 관한 보다 명확한 시각을 갖게 됐다는 점입니다.
1967년 서울시가 수립한 ‘불량건물정리계획’은 대단지 이주, 불량건물개량화, 공동아파트건립의 세 가지 정책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정책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현 성남시)에 광주대단지를 조성해 청계천, 종로 등지의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키는 것이었는데요, 주거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곳에 무대책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결국 1971년 8월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중단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낙산, 금화, 회현지구 등 고지대 판자촌에 시민아파트를 지어서 임대로 공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1969년 한 해에만 수백 동의 아파트가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1970년 4월 와우아파트의 붕괴로 시민아파트 건설은 동력을 잃었고 김현옥 시장은 시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971년 8월 광주대단지 소요사건은 1970년 4월 시민아파트 붕괴에 이어 서울의 폭력적이고 안이한 도시개발 계획이 맞이한 두 번째 파국이었다. 도시계획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서울시의 안이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투기를 조장하는 정책과 맞물려 거대한 파국을 불렀다. 서울의 도시 미관을 정비한다는 구실로, 판잣집을 철거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변두리나 도시 바깥으로 추방하는 방식은 한계에 달했다. 광주대단지사건은 최초의 도시빈민 봉기이자 박정희 정권기 최초의 폭력시위로서, 도시빈민들이 몰려 있는 정착지는 정권의 안정에 최선을 기해야 하는 정부에게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 315쪽
마지막으로 일부 불량지구는 상태에 따라 개량 및 양성화를 추진하고자 했습니다. 이마저도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도시빈민이 피눈물을 흘리게 됐다고 합니다.
판잣집 양성화 정책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강제이주 및 강제철거라는 본심을 숨기고 나온 선거용 정책이었다. 따라서 이 정책은 시작부터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었다. - 283쪽
그리하여 1967년 계획수립 당시 13만 6천 동이던 무허가건물 수는 3년 후에는 되레 18만 7천동으로 늘어났습니다. 서울 인구의 36% 이상이 무허가건물에 거주하는 등 이 시기의 무허가주택 정책은 실패했습니다.
판자촌을 없애고 싶어 하는 권력층의 소망과 반대로, 빈민 지대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1962년부터 도시 변두리에 집단 간이주택을 만들어 정착지로 삼으려던 계획은 그 주변 동네들까지 합법적 판자촌으로 만들어버리는 사태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집단이주 정책으로 형성된 지역은 현재 서울시의 대표적인 인구밀집지역들이다. 강북에서는 북쪽 지역의 도봉동, 상계동, 쌍문동, 미아동, 삼양동, 월계동, 그리고 서쪽 지역의 홍은동, 수색동, 응암동, 북가좌동, 남가좌동, 연희동에 빈민들이 이주했다. 강남에서는 서쪽의 신정동, 구로동, 신림동, 봉천동, 시흥동, 사당동에, 동쪽의 가락동, 오금동, 마천동, 거여동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집단이주 정착지였다. - 282쪽
이 책에서도 “내가 만약 그때 강남에 땅을 샀더라면이라는 가정법 문장은 오늘날 우스갯소리처럼 자주 회자되는 말”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성남이나 분당, 판교로 변주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영동개발 이후 강남을 둘러싼 일그러진 욕망은 유하 감독의 2014년 영화, <강남 1970>으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런데 영동 개발은 그렇게 속도전 속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부동산 투기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개발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진작가 권태규가 1981년도에 찍은 강남 풍경은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강남이 서울의 새로운 중심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서서히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서울시가 계획성 있게 준비하고 실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서울로 모여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쉽게 강남으로 이동하지 않아서 각종 유인책을 하나씩 써나갔기 때문이었다. - 358쪽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한 롯데캐슬 아파트 광고의 문구가 꽤나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의 책 한 구절을 변용한 듯한 한 줄의 카피가 바람직하지 않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란 점 때문이었겠지요.
한국인에게 집이란 그저 주거의 의미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 집을 소유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갖춰야 하는지, 그 경제력을 갖추기 위해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 보니 사는 곳이 경제력과 직업을 통해 유추하는 교육 수준까지 꽤나 많은 정보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당신이 어디 사는지 내게 말하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겠다'는 허풍도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니게 된 듯합니다.
한국에서 아파트의 성공은 현대적 삶의 이미지를 활용한 상품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아파트를 현대성의 유일한 상징으로 만드는 경향”은, 아파트가 대변하는 “서구식 모델”이 누리는 권위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4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