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정지돈 사태'를 조금 생각해 봤습니다.
어제 소설가 정지돈이 블로그를 통해 두 번째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내용이 참 살벌합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보자 보자 하니까 협박까지 하면서 꼴값을 떨고 있어서, 앞으로 민형사상의 법적 조치를 강구하겠다"는 선전포고로 읽힙니다.
이쯤 되니, 지금까지 '중립기어를 박은' 척하면서 사실은 '내 일 아니니 모른 척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쓸데없는 일'을 굳이 하고 싶진 않다는 게 지금까지의 변명이었죠. 그런데, 이쯤 되면 한 번쯤은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싶어졌습니다.
어느샌가 그렇게 작명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언론사의 명명행위는 몹시나 강력한 권력입니다. 그 명명행위에는 이미 가치 판단이 끝난 상태이기도 하고요. 따라서 한겨레는 '정지돈이 가해자'라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과거 '사생활 침해' 논란이 일어났던 김봉곤과 김세희의 경우에서처럼, '김봉곤 사태'라는 명명은 있지만 '김세희 사태'라는 명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언론사의 명명은 가해자의 이름을 쓰는 경우도 있고, 피해자의 이름을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해자의 이름을 쓰는 경우는 가해자의 비행에 대한 강력한 비난을 위해 쓰곤 합니다. 최근의 사례를 찾아보자면 '김건희 특검'이나 '김호중법'이 그런 경우가 되겠지요. 반대로 피해자의 이름을 쓰는 경우는 피해자에 비극에 동감하며 그의 피해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곤 합니다. '채해병 특검'이 그렇겠지요.
저는 '정지돈 사태'라는 명명이 꽤나 불편합니다. 심정적으로는 정지돈을 두둔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두둔하게 되는 마음에는 기본적으로 가부장적 질서에 기반한 미소지니가 자리 잡고 있을 테지만, 그렇게 단순한 마음일 수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여러 법적 문제뿐만 아니라 법 이외의 윤리 문제가 여러 층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보통신망법 상의 명예훼손의 문제는 물론이요, 형법상의 협박과 같은 형사법적 문제가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원고와 피고가 뒤바뀌는 여러 민사상 손해배상소송도 발생합니다. 여기에 문학의 윤리와 통상의 윤리 문제도 발견됩니다. 헤어진 연인 간의 예의는 어디까지 차려야 하나의 문제에서, 문학에서 핍진한 서사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현실이 어디까지냐는 '인용의 한계'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문학적으로 승화하기 위해 어떻게 서술해야 하냐는 '재현의 윤리'까지 참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에라 모르겠다'면서 모른 척해왔던 겁니다.
그런데 어느샌가 '사태'는 사과하고 판매중지했으니 정지돈이 나쁜 놈인데, 그 와중에도 자기 변명하기 급급해서 "천하의 정지돈이 왜 이리 혓바닥이 길어?"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그냥 '혐오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선동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그 메커니즘 하에서 혐오의 정당성을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사태'를 못 본 척하기가 영 불편해졌습니다.
선동의 메커니즘과 혐오의 정당화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개의 포스트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10대 후반이었던 30여 년 전 습작소설을 쓰곤 하던 큰 누이는 "자전소설이란 상상력이 빈곤한 소설가의 비겁한 자기변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누나 역시 누군가에게 배운 말이었을 테죠. 대학에서 소설에 대해 배우다 보니, 사소설이란 장르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소설가를 꿈꿨던 제게는 꽤나 무거운 족쇄가 되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20대 초반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사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했었습니다.
20대 초반에 습작을 몇 편 써본 뒤로, '풍부한 상상력의 부재'를 절감하고,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은 접었습니다. 핍진성을 갖춘 서사를 쓰려다 보니, 저란 개인이 경험한 세계를 서술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비틀어서 쓴다고 해도, "그거 내 이야기지?"라는 반문이 돌아오더군요. 임인택의 기사에서도 언급한 박서련의 「그 소설」과 같은 반응이 나옵니다. 소설을 쓴 사람 입장에서는 '소설 속 인물이 너는 아니지만, 네가 투영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고 강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소설의 파장과 함께 ‘경험의 소유권’ ‘이야기의 물권’이 논란이 된다.
대학 문창과 합평수업 때 맨 먼저 낙태 소설을 발표했던 별명 ‘화류계’인 언니 동기는 “그거 혹시 내 얘기 아니”냐 따지고, 엄마한텐 “어떤 새끼가 그랬어?” 추궁받고, 급기야 수술 전 이미 헤어져 연락한 지 10년 된, 그래서 소설을 쓰는 동안 단 한번 “떠올리지 않”았던 그 ‘어떤 새끼’로부터 듣는다.
“왜 그런 얘기를 썼어?” “그게 정말 우리 얘기가 아니라면, 왜 그런 걸 썼냐고.” “내가 다 폭로할 거야.” “네 소설 아니라고. 넌 낙태충 살인자 년이라고.”
이 소설은 작중 소설가와 소설 쓴 박서련을 스스로 동시 겨눈다는 점에서, 오토픽션의 문학적 무게를 보여준다.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내 얘기”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내 얘기”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야기, 그러나 “누구나의 내 이야기가 되는” 정언명령이랄까. 재현 윤리 밖 소설을 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 임인택, <정지돈 사태 선행한 소설들의 재현윤리, 작가는 안다>. 한겨레.
<그 소설>은 박서련의 문체가 워낙 유쾌하게 진행되어서 헛웃음을 지으며 읽을 수 있었지만, 조금 암울한 문체의 몇몇 소설가가 같은 소설을 썼다면 도저히 읽기 힘들 정도로 잔인했겠다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소설이란 서사문학을 창작하면서, 작가는 완전히 자연인인 자신과 결별하고 별개의 작가라는 인격체를 만들어내 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됩니다. 저로써는 불가능한 일인데요, 그런 경지에 이른 소설가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보면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습니다.
따라서 "소설가란 자신을 삶을 조금씩 팔아먹는 품팔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대학 시절 동아리 선배의 자조가 떠오르곤 합니다. 그 선배가 등단을 했는지,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 경험을 배제한 소설 쓰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변명처럼 늘어놓던 술자리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재현의 윤리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듯합니다. 다만, 이번만큼은 수박 겉핣기라도 하고 넘어가야만 할 듯합니다.
재현의 윤리를 깊숙하게 고민해 왔던 기왕의 학문적 시도들은 대부분 '홀로코스트'와 같은 집단트라우마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재현의 윤리가 단순히 사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문제를 넘어서, 권력관계, 이데올로기, 그리고 타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대변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지돈의 소설에 대한 김현지의 문제 제기와는 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죠.
물론 재현의 윤리에서 미시적으로 고찰해 본다면, 김현지의 문제 제기가 아주 상관없지는 않습니다. 단지 두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점입니다. 김현지와 등장인물 간의 동일성을 먼저 입증하고, 그 이후에 등장인물을 다루는 정지돈의 서술이 재현의 윤리를 전반적으로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정지돈에게 '재현의 윤리'를 들이밀며 비난을 이어가는 것은 온당한 처사가 될 수는 없다고 판단됩니다.
앞서 문제가 되었던 김봉곤의 경우에는 '사적 대화의 무단 사용'이 문제의 시발점이 되었으나, 그로 인해 본격적으로 '재현의 윤리'의 문제 봉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루었던 주제가 몹시 민감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아웃팅'이라는 재현의 윤리에 정면으로 맞닥뜨렸습니다. 김세희 경우도 비슷한 궤적을 보이는 듯했지만, 오히려 '정지돈사태'와 유사해 보입니다. 이때 김세희는 법적 대응을 예고했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는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보도해 주는 언론사는 한 곳도 없었습니다. 논란이 되었던 책은 다시 판매가 되고 있으니, 미루어 짐작건대 김세희의 주장이 더 높은 타당성을 갖춘 것으로 판단한 것일 테죠.
따라서 이번 '정지돈 사태'는 재현의 윤리로 확대해석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런 식으로 용어를 전유해서 전략적으로 이용하려는 '독선'적 태도는 되레 경계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나 그동안 심도 깊게 논의되어 왔던 재현의 윤리를 아주 협소한 개념으로 몰아넣고, 그리하여 '이름을 빼앗긴' 기왕의 담론들은 그 지위를 상실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정지돈 사태'도 여지없었습니다. 얄팍한 진영 논리가 재빠르게 구축되고, 그 논리에 근거한 혐오는 재빠르게 유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김현지와 정지돈은 어느 한쪽이 미친년이 되거나 미친놈이 되어야만 끝나는 극한의 게임으로 내몰렸습니다. 애초에 두 사람 모두가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을 겁니다. 다만 김현지의 문제 제기가 오랜 세월을 감내해 온 것치고는 너무 엉성했고, 정지돈의 대응은 너무 신중했던 탓도 큽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 하나가 사회적으로 매장되어야만 끝나는 사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젠 누가 이겨도 의미 없는 피로스의 승리가 될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혐오를 표출하는 이들만 신났을 뿐입니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지인'입니다. 문제제기는 보통 작가와 해당인을 다 아는 '지인'의 지적에서 시작합니다. 그 지적은 보통 '소설에 기반한 허구'를 사실로 오인하거나, 거기서 출발한 새로운 허구를 핍진한 사실로 주장하면서 비롯합니다. 도대체 지인들은 왜 그럴까를 심리학적으로 검토해보다 보면, 너무 끔찍한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러다가 인간 혐오가 발생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