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구단 리에 著/ 김영주 譯. 도쿄도동정탑. 문학동네. 2024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 요한복음 19장 9절. 『톰슨 II 큰 글자 주석성경』
(Exivit ergo Jesus portans coronam spineam, et purpureum vestimentum.) Et dicit eis: Ecce homo.
- Ioannes 19:5. Biblia Sacra Vulgata
“바벨탑의 재현.”으로 첫 문장을 시작한 소설은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로 마무리 짓습니다. 이 두 문장으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요약됩니다.
등장인물인 마키나 사라는 “‘도쿄에 아름다움과 평화를 가져다준 여신’이 되기도 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든 마녀’가 되기도 하는” 양극화된 상황에서, “최근 몇 년간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서 ’ 죽어라 ‘라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키나 사라는 “이해와 오해가 크게 다르지 않고”, “말을 통해 진정 무언가를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강변(强辯)하게 됩니다.
바벨탑은 창세기 11장 1절부터 9절에 걸쳐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늘에 닿을 수 있는 탑을 쌓으려는 인간을 좌절시키기 위해 언어를 달리해서 의사소통을 막았고, 그리하여 사람들은 흩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을 해야 하고, 그 의사소통은 공유할 수 있는 언어에 기반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같은 언어를 쓰는 데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며 반목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런 세태를 꼬집기 위해 이 소설에서도 참 많은 말을 뱉어 내지만, 결국은 이 말 한마디로 해결될 듯합니다.
불가타 성경에서 시작된 표현인 ‘에케 호모’는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 총독이 예수에 대한 처분을 묻기 위해 던진 말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19장 6절에서는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라고 전합니다. 흑백논리로 양극화되는 견해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라 요구하는 대중의 숙고 없음과 잔인함을 드러내기에 이보다 더 강력한 대척은 없을 듯합니다.
일본에서 출간된 책의 표지에는 위와 같이 세 가지 문자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문자가 무엇이든 ‘토교토 도조토’라는 발음은 같습니다. 그런데 ‘도쿄도 동정탑’은 거리가 너무 멉니다. 차라리 ‘도쿄도 도조토’나 ‘동경도 동정탑’이 번역서에 더 맞는 제목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처음 한겨레의 기사에서 접한 표지 이미지에서 발견한 제목은 ‘도쿄도동정탑’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목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2023년 하반기 제170회 아쿠타가와류노스케상 수상작이 꽤 빠르게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것에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이거 확실히 팔린다”는 촉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 어떤 출판사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을 번역해 출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사를 읽지도 않고 그냥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마음먹었습니다.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들이 한 번 검토했고, 문학동네가 한 번 더 검토했기 때문에, 그 권위에 기대보기로 한 겁니다. 그렇다고 딱히 사서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지도 않았습니다. 우사미 린의 『최애, 타오르다』를 읽고 난 뒤로, ‘이제 아쿠타가와상도 맛이 갔구나’란 생각(와타야 리사의 수상작에도 같은 생각이 들긴 했었습니다.)이 든 탓이 큽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파크 라이프』를 시작으로 제법 여러 권의 수상작들을 읽어 왔었는데요, 그때만큼의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받아 들고 나서야,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볼 있었습니다. 동정탑이면 발음이 어떻게 되지?라고 생각하면서 더듬더듬 발음을 해보니, 도조토가 될 듯싶었습니다. 그때서야 이 6자의 한자 東京都同情塔을 일본어로 발음하면 ‘토쿄토도죠토(とうきょうとどうじょうとう, 우는 장음표기)’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순간, ‘이거 확실히 말장난인데, 제목이 이 모양이란 건 말과 관계가 있겠구나’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다 보니 ‘도쿄도동정탑’이란 이도저도 아닌 제목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책을 읽는 내내 이것 때문에 짜증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경우까지 있었죠.
그것은 예를 들어 교도탑(이라고 내가 임시로 부여한 대항 후보)보다도 시류에 어울리고, 엄밀함과 세련됨의 부분에서 뛰어나며, 당사자에 대한 배려가 두루 미친 이름인가? - 20쪽
일본에서는 형무소(刑務所, けいむしょ)라는 단어를 쓰기 때문에, 원문에서는 ‘형무탑’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교도 역시 教導(きょうどう)라고 표기하기 때문에, ‘쿄도토’라는 말장난의 연장선인 줄만 알았습니다. 제 ‘오바가 쩔었던’ 탓이 크지만, 이마저도 번역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67쪽에서는 ‘쓰레기 ゴミ’라는 표기가 등장합니다. 심지어 이에 대한 각주도 달고 있죠.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런 방식으로 제목을 다루어 줄 수 있었을 겁니다.
마침내 제목이 처음으로 서사에 등장하는 순간의 번역도 마땅찮습니다.
“봐. 도쿄+도, 동정+탑. 좌우로 균형 잡힌 단어 구조에 발음상으로 리듬이 깔끔하고, 교도소에 어울리는 적절한 엄격함도 내포하고 있어. 이 정도로 확실하다면 분명 바벨탑도 무너지지 않을 거야. 이것 말고는 더 생각할 수도 없어. 심퍼시 어쩌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골조가 덜거덕거려서 호모 미세라빌리스도 안심하고 살 수 없을 거야. 적어도 나는 못 살아.” - 83쪽
161쪽에서야 나타난 “그보다, 일본어 발음이 좋네? 도쿄토 도조토. 발음이 좋아.”란 번역은 83쪽에서 등장했어야 합니다. 번역자도 편집자도 아주 큰 실수를 했다고 규탄해야 합니다.
등장인물인 마키나 사라는 ‘심퍼시 타워 도쿄’라는 영어 표현에 대단히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런저런 발언을 여러 차례 하지만, 그다지 중요한 내용은 아니라 인용하진 않겠습니다. 어차피 이 불만은 ‘심퍼시 타워 도쿄’의 건축 이념에 대한 내적 갈등을 뒤틀린 방법으로 표출하는 것일 뿐이라서 말입니다. 결국 자기기만을 위한 타협으로 일본어 명칭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등장인물인 맥스 클라인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만, 그 의문에는 이미 합당한 답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심퍼시 타워 도쿄와 도쿄도 동정탑 사이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거야? 언어를 무한히 생성함으로써 뭘 감추고 있는 거지? 만약 일본인이 일본어를 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 - 133쪽
사실 심퍼시 타워 도쿄와 도쿄도 도죠토 사이에는 의미상 차이가 존재할 순 없습니다. 그저 화용론 차원에서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 것으로 ‘맥락의 차이’를 제대로 드러내려는 것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적당한 역어가 존재하지 않거나, 역어로 채택된 것이 맥락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보니, 마키나 사라의 대사에서도 그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외국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바꿔 말하는 건 단순히 발음의 용이성이나 생략 때문인 경우가 있고, 불평등이나 차별적 표현을 회피하기 위함일 때도 있다. 그리고 어감이 순하고 완곡해져 모나지 않은 표현이 된다는 감각 차원의 이유도 있을 것이다. 고민될 때는 일단 외국어를 빌려 온다. 그러면 신기할 정도로 원만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 18쪽
결국 심퍼시 타워 도쿄와 도쿄도 도죠토 사이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마키나 사라의 자기 고백으로 드러납니다.
……나는 도쿄도 동정탑을 건설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고, 나의 나약함을 알고 있었지만 욕망을 통제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이 진심으로 동의하지 않는 프로젝트에는 협력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인류의 평화나 인간의 존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을 다른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말로 속인 것이 모든 실수의 근본적 원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회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한 인간이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 외부에서 요청하는 일을 맡지 않겠다. ……언젠가 다시 건축하는 날이 온다면 그건 온전히 마키나 사라의 투자에 의한 건축, 온전히 마키나 사라의 의지에 따른 건축이어야 한다. - 168쪽
자하 하디드가 도쿄에 남긴 그 유선형의 거대한 창조물에서는 무언가 특별한 파동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37쪽
자하 하디드는 ‘건축물 없는 건축가’로 유명합니다. 기념비적인 건축이 될 수 있는 설계임에는 틀림없지만, 건축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실제로 시공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도쿄국립경기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500억 엔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 자하 하디드의 설계안은 2015년 7월에 폐기되었고, 1,500억 엔 정도로 추산되는 구마 겐고의 설계로 변경되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DDP가 자하 하디드의 설계인데요, 최초 800억짜리 프로젝트가 자하 하디드의 설계로 5,000억짜리 프로젝트로 변경되었습니다. 그래서 최초 경합에 참여했던 국내 건축가들의 볼멘소리가 엄청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공공건축물을 그 따위로 건축하는 것도 문제가 있고요.
소설 속에서는 마사키 세토(이름이 한자가 아니라 가타카나로 표기)란 가공의 인물이 <Homo miserabilis: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이란 문헌을 발표한 것으로 나옵니다. 공교롭게도 호모 미세라빌리스라는 개념을 먼저 정립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호모 미세라빌리스는 마사키 세토의 그것과는 꽤 먼 개념입니다만 그렇다고 아주 무관하다고만 볼 수도 없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가장 논란이 되는 건 소설에 챗GPT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인터뷰 내용이 될 듯합니다. 챗GPT를 이용해서 생성한 문장이 5% 정도 소설에 사용되었다고 말해서 논란이 커졌었는데요, 그저 'AI-built'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AI답변에만 활용한 것으로 다시 인터뷰했습니다. 번역서에서는 고딕체를 써서 구별(소설의 서사는 명조체로, 소설 내의 다른 문헌들은 또 다른 명조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