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이치카와 사오. 헌치백. 허블. 2023.
소설의 미학적 측면에서만 봤을 때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범작이지만, 주제 의식만을 별개로 떼어냈을 때는 어마어마한 고민을 안겨줍니다. 꽤나 귀찮고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당시에 중절 규제법의 개정 움직임을 둘러싸고 장애인은 낳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성 단체와 살해당할 수 없다는 장애인 단체가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죽이는 측과 죽임을 당하는 측의 옥신각신은 ‘중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공통의 적으로 삼는 것으로 아우프헤벤해서 장애 여성의 리프로덕티브 라이츠까지 더듬어 갔고 나아가 아사카 유호의 이집트 가이로 연설을 낳았다. 1996년에는 마침내 장애인도 아이를 낳는 측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법이 정해졌지만, 생식 기술의 발전과 생활 필수품화에 따라 장애인 살해는 결국 수많은 커플에게 캐주얼한 것이 되었다. 머지않아 비용도 저렴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죽이기 위해 잉태하려고 하는 장애인이 있어도 괜찮은 거 아닌가? - 59쪽
우선 이 소설이 다루는 이야기는 지루하고 단순합니다. 59쪽의 인용 문단의 글이 작가의 주제 의식을 전부 담고 있다 봐도 무방합니다만, 이걸 제대로 풀어내질 못하고, 엉뚱한 변죽만 울리는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중심인물인 이자와 샤카(釋華는 釋迦, 紗花와 발음이 같음)의 인물 묘사 자체는 작가도 밝혔듯이 ‘당사자성’에 근거했기에 몹시 치밀한 편이라서 핍진성을 담아내지만, 진행되는 사건은 개연성의 부족으로 당최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복선이 부재했고, 따라서 이어지는 사건의 반전은 갑작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런 식의 결정적인 패착은 이자와 샤카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와 그 심리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워낙 많은 페이지를 소모한 탓이 큽니다. 과하게 그래서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샤카의 인물 묘사를 그저 당사자성이란 무기로 정당화하면서 서사의 균형을 뒤틀고 맙니다. 반작용으로 사건 진행을 위해 필수적인 인물인 다나카에 대한 기술이 부족해지고, 갑툭튀 인물인 다나카의 선택은 독자에게 수용되기 어렵게 됩니다. 인물 하나에 집착한 구성의 편집(偏執)이 이야기를 얼마나 지지부진하게 만드는가를 보여줍니다. 최악은 권말에 할애한 가공인물인 샤카(紗花)의 포르노그래피입니다. 서사적 실패를 위장하기 위해 극약 처방을 한 격인데요, 오히려 서사의 완결성에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 수상 소감은 더 짜증을 유발합니다. “아쿠타가와상에 승부를 걸어볼 작정으로 최근의 후보작들을 연구”한 결과가 이 소설이라는 것인데요, 번역되지 않았거나 읽었어도 짜증스러웠던 작품들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싶어집니다. 이 소설도 ‘어떻게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볼멘소리를 내게 만드는 작품 중에 하나로 추가됩니다.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회차 수상자인 구단 리에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는 요령이 있다는 재미난 인터뷰를 했습니다. 다소 뻔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열심히 써서 그럴듯한 ‘중편’을 쓰면 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제한된 분량, 그러니까 단편보다는 호흡이 길어서 어중간한 이야기로는 안 되지만, 장편처럼 넉넉한 분량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빠르게 집중해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 길을 잃지 말고, ‘한 놈만 패는’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치카와 사오의 이 소설은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중증장애인의 ‘당사자성’과 ‘재현의 윤리’ 때문으로 보입니다.
문학이 되었든 영화가 되었든 드라마가 되었든, 서사물에서는 종종 재현의 윤리를 고민하게 됩니다. 주로 소수자의 트라우마를 다루면서 그것을 윤리적으로 다루었느냐의 문제가 ‘재현의 윤리’로 주목받습니다. 이는 창작의 층위와 독자 수용의 층위에서 개별적으로 고민하게 됩니다. 창작의 층위에서는 저자가 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시작으로, 그걸 다루어내는 저자의 철학이 공감에 근거해 포용으로 나아가는 ‘윤리적 태도’를 갖추었으냐로 확장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소수자에 속하는 당사자가 된다면 대체로 이 층위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법률 용어인 소송 당사자성에서 출발한 ‘당사자성’의 개념은 1970년대 일본 장애인 인권 운동 진영에서 전용된 용어라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일본의 법률 용어를 대부분 공유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폭넓게 당사자성 개념을 장애인 인권 운동에 녹여내고, 소수자 담론 전반에 전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자전소설(auto fiction)의 창작 층위 재현의 윤리는 그 당사자성으로 정당화를 해왔습니다만, 김봉곤, 김세희, 정지돈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창작 활동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서는 이와 같은 조각(阻却) 사유를 부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긴 합니다.
자전소설(auto fiction)의 외형을 갖춘 서사는 종종 그 저자에게 꽤나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어 줍니다. 이치카와 사오는 “아버지가 어느 틈에 『헌치백』을 읽어버렸는지, 낯부끄럽다고 크게 화를 내면서 ‘이런 창피한 얘기로 아쿠타가와상을 타서 뭐 할 건데!’라고 처음에는 혼을 냈었”다고 인터뷰했습니다. 박서련의 「그 소설」이 떠오를 정도로, 골이 지끈거리는 상황이 똑 닮았습니다. 중증장애인이 그 당사자성에 발붙이고 쓴 소설인지라, ‘개인의 경험’을 배제하고 ‘순수한 창작’으로 축조해 낸 서사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적 구체성을 ‘저자가 직접 경험한 사실’로 이해할 근거 역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 개인과 친분이 있는 ‘지인’들은 작품 내의 서술자나 인물을 저자와 동일시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곤 합니다. 재현의 윤리와는 전혀 상관없지만, 종종 ‘재현의 윤리’가 소환되는 뷔를레스크한 지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