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시간을 걷다, 모던 서울. 지식의날개. 2024.
이 책은 서울의 각 공간을 그 공간이 품고 있는 굵직한 사건과 이야기, 인물과 역사, 예술과 문학 등이 서로 교차하는 열일곱 편의 이야기로 연결했다. - 19쪽
대부분의 책은 머리말을 읽어 보면, 왜 이 책을 쓰게 됐는지 그래서 어떤 내용으로 책을 엮어냈는지를 잘 드러냅니다. 무엇보다 책으로 생각을 풀어내는 작업은 몹시나 정교하고 체계 잡힌 일이라서, 머리말에서 요약이 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뜻풀이 하고 있는 책의 정의에서도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여 적거나 인쇄하여 묶어 놓은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일정한 체재(體裁)’를 갖추어야 해서, 그 구조 분석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 구조분석을 간단하게 도식화하면 차례(次例)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표준국어대사전의 도움을 빌리자면, “책이나 글 따위에서 벌여 적어 놓은 항목”을 말하는데요, “책의 차례를 보면 그 책의 짜임을 알 수 있다”는 예문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뜻밖의 혼돈’을 경험하곤 합니다. 머리말을 읽어봐도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렵고, 차례에서 참 자세하게도 늘어놓는데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 책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걸으려는 서울은 바로 이 트라우마적인 기억과 관련된 장소들이다. 식민, 분단, 전쟁 등으로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치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혹은 볼 수 없었던, 그렇지만 그것이 과거에서 현재로 여전히 이어지며 우리의 삶의 공간으로 존재하는 곳이 이 책에서 걸으려는 서울이다. - 16쪽
글을 쓰려고 다시 읽어 봐도, 짜증을 솟게 만드는 이 허황한 말잔치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분식(粉飾)입니다.
무언가를 정리해서 말하고 싶어서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행본 실적을 만들기 위해 다수의 필진에게 원고를 청탁한 경우로 보입니다. 이럴 때는 원고들을 모아봐야 서로 끌어당기는 인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름 전쯤에 썼던 리뷰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편집위원회에서 친분 있는 인사들에게 서울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무언가를 써줄 수 있냐고 제안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면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자기 복제의 글이 중구난방으로 난립하게 될 겁니다. 그런 방식이라면 최악의 경우가 되겠지요.
『서울의 인문학』은 기획이 선행하고, 그에 맞는 원고를 수집한 다음, 비로소 편집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이라는 인력풀 안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원고를 취합한 뒤에, 비로소 어떻게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편집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추상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차례가 그런 현실을 드러냅니다. 게다가 글의 형식들도 중구난방입니다. 누군가는 논문에 준하는 형식의 글을 쓴 반면에, 누군가는 기행문을 또 다른 이는 르포르타주를 썼습니다. 어질어질합니다.
이 절망스러운 편집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데는 큰 불편함은 없습니다. 어차피 원고들이 상호맥락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인 원고들을 개별적으로 썼기 때문에, 그냥 각각의 글들을 읽으면 그만입니다.
저는 서울에 관한 책을 자주 읽습니다. 서울이란 도시를 좋아하기 때문인데요, ‘나는 왜 서울이 좋은가’를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언제까지나 ‘그냥 좋다’고 말할 순 없기에, ‘이래서 좋다’고 스스로 납득할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책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 자체의 완성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책 안에서 제게 필요한 내용을 찾아내기만 하면 그만이라, 뭐랄까요 채광작업이란 생각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끝까지 읽는 이유에 대해서도 앞서 고민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주워 먹을 게 있을 때”에 계속 책장을 넘기곤 합니다. 건전한 취미 생활로 네이버 블로그에 서울에 관한 포스트를 정리하고 있는데요, 이 포스트들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줄 ‘인문학적 레퍼런스’를 수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괜한 위화감이 들었는데요, 머지않아 눈치를 챌 수 있었습니다. 바로 ‘주석’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인문학적인 글쓰기에서 주석은 빼놓기 어렵습니다. 저자의 책무는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드러내는 것도 있지만, 남의 생각을 어떻게 내재화해서 표현했는지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인용을 할 수밖에 없고, 그 인용에 대해서는 각주가 됐건 미주가 됐건 주석을 달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주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주석이 없다는 건 제법 미묘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인문학적 글쓰기의 특성상 자료 조사와 인용은 필수적입니다. 우선 도용이나 표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면죄부임과 동시에, 글을 읽는 사람에게 ‘참고문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독서의 연쇄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동료검토(peer review)를 통해 사실로 확인된 참고자료를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글의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에서라도 주석을 달고 참고자료목록을 정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처럼 참고자료목록도 없고, 주석도 없는 책이라면 마음 편하게 인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하나의 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문에서 선언하고 있는 내용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모던(modern)은 우리말의 근/현대를 통칭하는 개념”이라던가, “코리언에게 모던은 제국주의의 침탈과 식민이라는 역사적 상처의 경험과 함께 시작됐다”는 용어의 전유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이럴 때가 비로소 참고문헌의 지지가 필요해집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일방적 주장’을 벗어나긴 어려워질 듯합니다. 마치 제가 블로그에 써갈겨간 ‘뇌피셜’(이라 썼지만 자료조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처럼 말입니다.
modern에 대한 역어로 '근대'를, contemporary에 대한 역어로 '현대'를 사용하는 건 일반적인 듯하다. 현재 널리 통용되고 있는 '선사-고대-중세-근대-현대'의 역사 구분이 그러하듯이, 대략적으로 1945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은 '모던 시대'로, 그리고 혼란의 1950년대를 지나 1960년대부터를 '포스트 모던 시대'로 보는 듯하다. 이 '포스트 모던 시대'는 1990년대까지 이어졌는데, 그 당시에는 '컨템퍼러리'한 시대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당시에 식민사관 중에 하나였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반박으로 한국사의 근대 기점에 대한 논의들이 꽤나 활발히 논의되었다. 유럽의 제도사 관점에서 형성된 '모던 시대'가 동양과 맞닿을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19세기 중반에 폭발적으로 경험하게 된 '모던', 그러니까 근대적 기획(modern project)이나 근대적 제도(modern institution)의 경험이 꽤나 역사적 맥락에서 단절적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이식(移植)의 경험'은 '근대의 기점' 담론으로 발전하게 되고, '식민지 근대화론'의 토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에 90년대까지 '근대'라는 역어의 문제성을 몹시 강하게 지적하면서, '근대'의 설정에 대한 꽤나 여러 가지 논의가 진행되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포스트 모던 시대'도 이제는 '컨템퍼러리'의 범주 안에 넣기 어려워졌다. 따라서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모던 시대를 '초기 모던(early modern)'과 '후기 모던(late modern)'으로 분리하고, '컨템퍼러리 시대'를 더욱 크게 확대해 나아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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