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학이 메울수 있는 빈 틈
A 씨는 진료실에 앉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렇게 지팡이 없이 온 게 안 보이세요? 6개월만에 밥과 김치를 먹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이던지..." 70대 후반의 그는 2주만에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 '큰병원' 에서 약 1년 전 부터 생긴 온 몸이 떨리고 잘 걷지 못하는 증상에 대하여 원인을 찾기 위한 검사를 입원까지 해서 받았지만, 끝끝내 원인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증상이 생긴 1년여 전 부터 함께 생긴 것으로는 늘상 식사를 마치면 욕지기가 생기는 증상이 반복되고, 이 때문에 점차 식사를 잘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불편감을 주 호소로 A 씨는 내 진료실을 찾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A 씨와의 첫 만남은 내가 그의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책' 을 가져온다는 표현을 쓴다. 해결되지 않는 여러가지 의학적 문제로 여러 의료기관을 오가다 보면 반복되는 검사와 기록지, 처방이 쌓이면서 점점 두꺼워 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다른 의료기관들의 의무기록 사본이 두꺼워서 높이 쌓이게 된 그것들을 보며 '책' 이라고 일컫는다. 새로 온 환자의 '책'을 읽는 일은 마치 직원 식당에서 나오는 뼈 투성이 생선에서 미세하게 존재하는, 먹을 만한 살을 발라내는 일과 비슷하다. 별로 관심이 없는 검사 결과만 반복되고, 내가 정말 궁금해하는 바인, 이전 의사가 최종적으로 어떤 의학적 의사결정을 내리게 된 판단의 계기를 엿볼 수 있는 사람이 쓴 글은 찾기가 참 어렵다. 모든 의사들이 너무 바쁘다.
1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고혈압과 관절통이 그럭저럭 조절되던 그가 소화 장애와 떨림이 생겨 결국 흰죽과 미음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되기 까지는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의 '책' 을 통해 그가 떨리고 걷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무척 광범위한 검사를 받았음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중 나의 눈길을 끈 것은 CIT PET 검사였다. 이 검사는 분자적인 방법으로 도파민 뉴런이 얼마나 잘 작동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방법이라, CIT PET 이 완전히 정상이라면 어느정도 자신있게 파킨슨병의 가능성은 제쳐놓을 수가 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과 떨림은 비교적 전형적인 파킨슨병의 양상이었기에, 그는 도파민 부족을 완화시킬 수 있는 약(도파민의 전구체)을 처방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 먹기만 하면 토하는 현상은 더 심해졌다. 위, 대장 내시경을 받고 CT를 찍어 보았지만 나오는 것은 없었다. 위장 약이 하나 둘 늘어갔다. 그리고 걷는 데에는 지팡이가 필요하게 되었다. 불과 6개월 전에는 등산과 골프를 하던 그도, 이제는 집 밖에 나오는 데에 부축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행이도 지난 1년간 여러 곳의 의료기관에서 처방받아온 모든 약의 목록을 가져오신 터라, 그의 기록과 증상의 변화를 추가되고 바뀐 약의 변화와 정리하여 보니 A 씨의 의학적 문제목록, 신체 기능의 변화 양상과 지금의 당면한 문제가 뚜렷해졌다.
진통소염제 한알이 시작이었다. 소염 진통제는 속을 쓰리게 하는 잘 알려진 부작용이 있어, 이를 막고자 함께 처방을 받았던 소화제가 도파민 뉴런의 기능을 떨어뜨리는 특성이 있었다. 대부분의 젊은 성인에서는, 특정 부작용이 알려진 약제를 복용하더라도 별다른 이상을 인지하지 못하고 치료가 끝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장기의 노화가 진행된 어르신에서는 이런 현상이 뚜렷한 증상으로가지 발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1년이 흘러가는 동안 A 씨의 약은 하나 둘씩 늘어갔다. 한 가지 약에 의해 생겼을 수 있는 증상이지만 그약을 쓰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다른 의사가 - 우리나라에서는 해당 증상과 연관된 전문 과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니다. - 그 새로 생긴 증상에 대하여 또 약을 추가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노인의학을 하는 사람들은 처방 연쇄(prescribing cascade)라고 부른다.
안타깝게도 A 씨가 신경과에서 처방받은 파킨슨약의 부작용은 또 구역, 구토였다. 여기에 대해 내과의사는 소화제를 더 늘여 나갔고, 소염제, 소화제, 혈압약과 파킨슨약이 더해지며 A 씨는 점차 쇠약해져 갔다. 모든 것이 나빠지면서 결국에는 흰 죽과 미음 밖에 먹지를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들어와 의자에 앉은 그를 진찰하였을 때, 그의 악력은 동년배의 평균 비해 훨씬 약했다. 다리의 부종이 눈에 띄었다. 영양 결핍과 여러 약제에 의한 효과, 노화, 콩팥 이상이 겹쳐 이렇게 부어오른 것이다. 혈액검사를 하여 보니 콩팥 기능도 동년배의 절반 수준이었다.
10가지가 넘는 약 중에서 소화제와 소염제, 파킨슨약을 포함하여 2/3 정도의 약을 정리했다. 여러가지(통상적으로는 5가지 이상의 종류)의 약을 일상적으로 복용하는 것을 다약제 사용(polypharmacy)라고 한다. 65세 이상 어르신의 거의 40%가 다약제 복용을 경험하고 있는데, 약이 10개 이상이 되면 유의미한 부작용을 경험할 가능성이 거의 100%인 것으로 연구를 통해 알려져 있다. 이것을 A 씨의 경우 처럼 상황에 맞추어 거꾸로 풀어나가고, 이익 보다는 손해가 클 것 같은 약을 조정하고 줄여나가는 과정을 탈처방(deprescribing)이라고 한다. 혹시 예상치 못한 경과가 진행될 까 걱정이 되어, 2주 후에 진료를 다시 하기로 했다. 그런 그가 지팡이 없이 진료실에 들어온 것이다. 처방 조정을 하고 3일이 지나자 식욕이 생기고 서서히 위약감이 나아지며, 점차 일상생활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루이스 애런슨의 '나이듦에 관하여' 나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 는 노인의학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린, 무척 잘 쓰여진 책이다. 이 두 책에서 반복적으로 사례와 연구를 들며 언급하는 것이 지금까지 전문화, 분절화 되어 온 현대 의학 시스템이 복잡한 의학적 문제와 기능적, 사회적 요구가 섞여 있는 노인 환자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거나 오히려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다. A 씨와 같은 사례는 두 책에서도 언급되는데, 장기 중심, 질병 중심의 현재의 성인 진료 체계에서는 이렇게 섞여 있는 모든 문제들과 약, 그의 삶의 경과를 놓고 들여다 볼 수 있는 의사가 없다. 노인병 의사가 없다면. 그러다 보니 노인의학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개념인, 처방 연쇄와 탈처방을 고민하는 의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의사의 잘못이 아니다. 건강보험의 지불 구조부터 모든 것이, 내가 전문으로 걸고 있는 내용만 빨리 보고, 약을 처방하고 또 바로 다음 환자로 넘어가야만 겨우 수지를 맞출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게 당연하니, 환자가 되더라도, 생겨난 증상과 관련이 있는 전문과로 진료를 받으러 간다.
이런 시스템의 결과로, 약제 유발 파킨슨증과 파킨슨 약제에 의한 소화 불량이 뱅글뱅글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게 된 것이다.
생물학적, 생리학적으로 많은 것이 성인과 다른 아기가 아플 때 소아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것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소아는 작은 성인이 아니다' 라는 단어는 의과대학에서 소아과학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듣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의 갯수가 많고, 따라서 약의 갯수도 많고, 젊은 성인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기능을 보이는 어르신을 젊은 성인과 다른 방법으로 진료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쉽게 듣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2017년에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하였고, 2030년대가 되면 전 세계에서 가장 기대수명이 긴 나라가 된다. 우리나라와 경제 수준이 비슷하거나, 고령화를 앞서갔던 나라들은 대부분 A 씨와 같은 문제를 오래 전부터 인지하고, 노인의학을 육성했다. 2002년 WHO 가 조사했던 TeGeMe 연구에 따르면 (해당 연구에 한국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선진국은 물론이고 개발도상국에서도 상당수의 국가에서 소아과학 처럼 노인의학을 교육하고, 공식적인 분야로 진료를 수행하도록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2010년 한림대 유형준 교수의 '국내 노인의학 교육 현황 및 미래' 에서는 국내 노인의학 교육이 산발적으로 발아하고 있을 뿐이며 교육의 양과 질이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사정은 2020년인 현재에도 거의 나아진 것이 없다.
결국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노인의학적인 문제는 아무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방 안의 코끼리가 되었다. 만성 질환과 노쇠가 중첩되어 있더라도 A씨의 사례처럼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문제를 잘 관리하면 놓칠 법한 일들을 해결하고, 좋은 삶의 질과 독립적 일상생활을 되찾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허용하지 않는 의료 환경 속에서 정부는 결과만 보려고 한다. 이러한 노인의학적 돌봄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는 현실 속에서 - 아직도 노년과, 노년내과 등이 설치된 병원이 많지 않고, 질병명이나 장기명을 표방하지 않으니 환자들도 잘 찾지 않는다 - 요양병원 입원 환자가 느는 현상을 비난하고 제도적으로 규탄하는 것이 현재까지 정부의 대응이다. 이를 해소하고자 일본의 지역사회포괄케어를 벤치마크하여 진행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지역사회통합돌봄에도 아직까지 노인의학적 접근에 대한 이야기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도 기존의 공공 서비스에 지역사회에서 노인의학적 돌봄을 접목할 경우 일생생활 수행 기능이 떨어지는 것을 예방하고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음을 평창보건의료원 등이 여러차례 보고하였던 바 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사람의 전반적 건강, 기능, 사회적 상태와 채워지지 못한 필요를 종합적이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노인의학적 접근의 신체기능 효과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개발중인 근감소증 치료 신약보다 훨씬 높았던 것이다. 연구 결과를 숫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신체 나이 5년 이상을 '젊게 만드는' 효과였다.
어떤 회사가 별다른 부작용 없이 사람의 신체 나이를 5년 젊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신약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면 - 진시황 이래, 이미 진행된 노화를 되돌리는 소위 역노화 기술은 아직까지 사람에서 성공한 적이 없다. 노화를 더디게 만드는 방법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인데, 이후에 더 깊이 다룰 것이다. - 그 회사의 주식 시가 총액은 수십 조원에 이를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한 접근 방식에 따라, A 씨는 약을 빼는 것을 통해 일상을 되찾게 되었다. 6개월만에 밥을 먹은 한 남자의 실화이다.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 원인을 찾아내는 노력만으로 사람을 눈에 띄게 좋아지게 만들 수 있는 바로 이런 사례들이 나를 노인의학으로 이끌었는데, 이번에도 또 큰 개인적 보람을 얻는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드는 이런 진료는 아직까지는 병원에서는 하면 할수록 손해가 된다. 복잡한 걸 아무리 자세하게 들여다 보고 싶더라도, 노년내과로 오는 어르신 환자들은 심층진료의 대상에 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진료가 우리 나라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지 않을까.